배고파 죽은 넋 위로한 이팝나무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순천 평중리 이팝나무

순천 평중리 이팝나무

이팝나무 꽃이 하르르 피어났다. 하얀 쌀밥을 소복이 담은 ‘고봉밥’을 떠올릴 만한 꽃을 피워서 ‘이팝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 토종 나무의 향긋한 꽃이다. 입하 즈음에 피어나 보름 넘게 은은한 향을 피우며 오래 머무르는 꽃이어서 예로부터 선조들이 좋아해 왔다.

이팝나무는 수십 년 전만 해도 중부지방에서는 키우기 어려울 정도로 따뜻한 기후를 좋아한 나무였으나 이제는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에서도 흔히 심어 키우는 나무가 됐다. 아름다운 꽃에 담긴 기후변화의 신호는 사뭇 이 땅의 참담한 사정을 떠올리게 한다.

크고 건강하게 잘 자란 이팝나무 노거수를 보려면 그래서 남부지방으로 가야 한다. ‘순천 평중리 이팝나무’는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나무로 꼽힌다. 높이 18m에 가슴높이 줄기둘레가 5m에 이르며, 나이는 400년을 너끈히 넘는 큰 나무다. 무엇보다 이팝나무를 대표할 만한 전형적인 수형을 갖추었다는 점이 돋보인다.

‘순천 평중리 이팝나무’는 마을 앞 논 가장자리의 둔덕 위에 소박하게 마련한 정자 곁의 정자나무로 농촌의 봄 풍광을 싱그럽게 하는 랜드마크 구실을 한다. 옛 농부들은 이팝나무 꽃이 활짝 피면 풍년이 들고, 반대로 꽃이 부실하면 흉년이 들어 보릿고개를 대비해야 한다고 믿었다. 오랜 경험에 따른 믿음이지만, 과학적 사실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이팝나무의 꽃이 필 무렵이면 농부들은 모내기를 하게 되는데, 이때 비가 적당히 내려 습도가 유지되고 햇살이 따뜻해야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다. 곧 이팝나무 꽃이 풍성하게 필 조건과 정확히 닿은 상황이다. 결국 이팝나무 꽃이 잘 피어나면 벼가 튼실하게 자라서 풍성한 알곡을 맺는다는 이야기다.

하릴없이 보릿고개를 맞이해야 했던 시절에는 특히 배곯아 죽은 넋을 위로하기 위해 무덤가에 이팝나무를 심었다. 가정의달 오월이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이팝나무 꽃무리 앞에서 지금 우리 가족이 누리는 풍요를 감사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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