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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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 조국혁신당은 ‘대안정당’으로 성장 가능한가 이번 총선 시기 정치 현실의 변화(가능성)와 관련해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조국혁신당의 등장과 선전이다. 선거와 정치 전문가들은 대체로 정당 지지율, 특히 비례대표정당 지지 의향 등을 근거로 조국혁신당이 15석 안팎의 의석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한다. 단독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지는 못하지만, 신생 정당으로서는 대단한 성과다.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와 더불어민주연합을 제외하면 독자적 입지를 지닌 ‘제3당’이 될 공산이 크다. 그런데 조국혁신당은 15석을 얻고 제3당이 되었다 해도 결국 양대 정당인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에 비하면 그저 ‘군소 정당’에 불과하다. 양대 정당 지배체제하에서 군소 정당의 독자적 생존과 성장이 쉽지 않음을 감안할 때, 조국혁신당의 ‘진짜 승부’는 사실상 총선 이후에 펼쳐진다. 군소 정당이지만 적어도 독자적인 제3당으로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세력, 즉 ‘실효 정당’으로서 역할을 하겠다면 그렇다. 현재로서는 그렇게 역할을 할 의사가 더 큰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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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 이재명민주당과 조국신당 ‘현상’을 보며 소위 ‘친명횡재 비명횡사’로 불리는 공천으로 더불어민주당이 ‘이재명민주당’이 되었다는 항의성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공감 가고 동의되는 바가 큰지, 여론조사상으로도 더불어민주당의 공천이 불공정했다는 비판적 평가가 우세하다. 국민의힘에 비해서도 그렇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정권심판의 길로 다 같이 모이자고 해놓고, 왜 그리 친문을 비롯한 비명계에게 박한지 의문이다. 꼭 그래야 했을까? 임혁백 공천관리위원장의 말처럼 윤석열 정권 출범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어디 친문만의 책임일까? 대선 후보였던 이재명 대표를 비롯한 친명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선 정국에서 가해진 반이재명 여론과 정서를 넘어서야 했던 것은 이재명 후보와 친명 자신이었다. 격차가 0.73%에 그쳤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 미세한 격차는 전쟁의 기원이 아니라, 전투 현장에서의 초식 운영 탓일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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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 586정치인들의 진짜 문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586정치인 척결을 출사표로 내걸었다. 가진 신념이 그렇기도 하겠으나, 586정치인 퇴진론에 동조하는 이들에 기대어 총선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계산이 작용한 것이리라. 한 위원장은 과연 586정치인 척결을 이루고 그에 기대어 총선 승리를 거둘 수 있을까? 586정치인 척결을 주창하는 이들이 스스로 던지고 답해야 할 물음이 있다. 586정치인 퇴진론이 나온 지 꽤 오래되었고 다수 여론임에도 불구하고 586정치인들이 유력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또 586정치인 퇴진론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주도하는 자신들의 지지도가 오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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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 전두광의 ‘절대적 악마화’가 우리를 구원할까 갑작스럽게 침묵이 흘렀다. 아니, 침묵이 하늘에서 쿵하고 내려앉은 듯했다.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라는 격한 구호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2000명은 족히 넘었을 이들이 동시에 입을 닫았다. 아니,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말을 잃었다. 5월의 따가운 햇살만이 대기를 채웠다. 그사이에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의 눈길이 오로지 한 사람에게 맞춰졌다. 그가 누구였길래, 또 무엇을 했길래 그랬던 것일까? 1988년 5월18일의 일이었을 거다. 8년 전인 1980년 5월의 광주학살 이후 최초로 전국의 청년대학생들이 광주로 집결해 공개적으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그 와중에 나온 구호가 바로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였다. 전두환을 위시로 한 신군부 독재 세력에 대한 응축된 분노가 표출되고 처벌의 극단을 요구했음을 알려준다. 당시 대통령은 노태우였다. 그는 전두환과 함께 광주학살을 자행한 신군부 세력의 핵심이었다. 그랬다. 지금껏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이들이 주로 담론화한 ‘주류 역사’는 1987년 6월 항쟁을 승리로 채색하지만, 그 승리의 결과는 신군부 세력의 변형적 연속성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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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 민주주의 위기의 실체 민주주의, 한국에서 정치를 논할 때 정치인과 학자를 위시로 한 정치관계자들이 가장 흔하게 입에 올리는 용어다. 대체로 민주주의가 잘되고 있다는 것보다는 잘 안되고 있다는 차원에서 사용된다. 이때 꼭 ‘위기’라는 말이 함께 쓰인다. 즉,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일컬어진다. 현 윤석열 정권의 지지기반인 보수세력의 경우, 그냥 민주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꼭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라고 한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보세력과의 이념적 시각 차이를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그게 자유민주주의든, 그냥 민주주의든 진보세력과 보수세력 모두 정치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표현한다. 왜 그런 걸까? 민주주의가 진짜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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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 시민 주도의 정치판 만들기 서울 강서구청장 보선을 치른 후 모든 정당에서 ‘혁신’이 다시금 화두다. 그런데 뭘 어찌 혁신하려는지, 그게 뭐든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진짜 하겠다는 것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목청 높여 소란스럽게 당 지도부 혹은 집권세력에 책임 추궁만 하고 있을 뿐이다. 선거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지 모르지만 총선 승리라는 당면의 목표를 감안하면 주어진 혁신의 시간은 별로 많지 않다. 이런저런 조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효과를 통해 성패가 갈린다고 할 때 특히 그렇다. 효과의 중요성은 이번 보선 승패가 누가 더 잘했느냐가 아니라, 누구에게 더 화가 나 있는지를 담고 있을 따름이라고 할 때, 한층 더 심대하게 여겨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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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 이념의 무서움을 목도할 순간이 도래하는가 이념은 무섭다. 이는 그저 좋은 것으로만, 그래서 지켜야만 하는 이념으로 여겨지는 민주주의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폭력을 동반한 혁명과 전쟁을 통해 만들어져왔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민주주의 이념 자체가 엄청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가질 자격도 없는 피지배층으로서 온갖 고된 노동을 담당하는 하찮은 ‘민(民)’이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과 체제가 바로 민주주의(민주정)가 뜻하는 바이기에 무섭지 않을 수가 없다. 즉 민주주의는 ‘전복’의 이념이다. 특히 기존의 지배층이 무서워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부의 독점적 소유권과 행사권을 부정당하는 이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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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 ‘노회찬 평전’이 재점화한 ‘좋은 정치’로의 열망 ‘병’을 앓고 있다. 노회찬, 그가 떠난 후 발병했고 지난 5년간 계속 악화되어왔다. 현실의 정치가 시시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병이다. 정치 현실에 대한 판단을 중지한 채 마주한 빈 벽에 눈길을 두고 아무 말 없이, 어떤 몸짓도 없이 거실 소파에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게 하나도 힘들지 않다. 짐작하건대, 나 말고도 그가 떠난 후 이런 증상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염원과 열정과 의지를 가졌던 사람들이라면. 이들에게 노회찬의 삶과 죽음은 본인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함께했던 자신들의 것이기도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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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 ‘심층적응의 정치’가 필요하다 사회의 붕괴와 문명의 종말을 예견하는 이들이 있다. 종전에는 강한 부정과 냉소의 대상이었다. 지금은 부분 혹은 변형적 수용의 대상이다. 주로 기후변화의 치명적 위협을 추적하고 경고하는 연구자·활동가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2020년 말 60명이 넘는 기후학자를 포함해 30개국 450명 이상의 과학자가 붕괴 위험을 경고하는 서한에 서명을 하기도 했다(http://www.scholarswarning.net). 이들을 부정과 냉소, 부분 혹은 변형적 수용의 대상으로 간주한 주(도)체는 일군의 정부, 기업, 주류 언론 등이었다. 이들에 동조하는 개인과 집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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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 진정한 보수에서 새 진보의 실마리 찾기(2) ‘김남국 코인 사태’는 정치인도 물질주의와 사익추구의 강화 경향에 지배당하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전수 조사하자는 주장에 정치권이 머뭇거리는 것을 보면 그 확신은 타당한 것일 수 있다. 정치인도 물질주의와 사익추구의 강화 경향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문장은 그러지 않아야 한다는 가정을 담고 있다. 즉, 정치인은 물질주의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이해갈등 조정의 힘인 권위를 얻을 수 있고, 그 기반인 신뢰를 쌓을 수 있다. 어느 원시 부족의 늙은 족장에게 젊고 힘센 전사들도 복종하는 이유가 바로 신뢰에 기반한 권위, 즉 ‘진정한 리더십’ 때문이라고 하고, 그것이 ‘무소유’에서 나온다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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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 진정한 보수에서 새 진보의 실마리 찾기(1) “빈곤이 아니라 확신과 소속감이 대중을 이끌어 전체주의 정당을 지지하게 만든다. (중략) 하루 세 끼의 식사가 존재하든 안 하든 간에 심지어 단순히 직업이 있든 없든 간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지는 않는다. 결정적인 이유는 준거의 틀이다. (중략) 개인이 직접 속한 사회가 소원하거나 목적이 없거나 적대적이 되면, 사람들이 모두 차별과 배제의 희생자라고 느낀다면, 세상의 모든 음식과 직업이 있다 해도 그들을 막지 못한다.”(러셀 커크, 이재학 역, <보수의 정신>, 2018, 지식노마드, 769쪽 중에서)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이 유행한다. 인류문명과 그것을 이루는 인간의 공동체적 삶의 총체적 실천인 정치에서도 꺾이지 않는 마음은 중요하다. 부서지면 다시 세우고, 세우고 나서는 끊임없이 매만지며 다듬어야 한다. 그래야 안팎에서의 붕괴와 파괴의 위협에 맞설 수 있다. 또 ‘오래된 미래’를 찬찬히 살펴 영감을 얻고 새로운 방도를 찾아내 존중받는 인간의 삶을 영위하며 저마다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공동체적 질서를 벼리거나 존속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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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 적과 동지의 분별과 현명함 현명함. 어질고 슬기로워 사리에 밝음을 뜻한다. 여기서 핵심은 분별이다. 그럼 무엇을 분별해야 한다는 것일까? 옳음과 그름? 좋음과 나쁨? 맞음과 틀림? 그렇다. 그런 것들을 헤아려 내고 옳음과 좋음과 맞음을 행해야 한다. 그게 분별이다. 그런데 정치, 그중에서도 용산과 여의도를 축으로 해 전개되는 작금의 현실 정치를 보자. 그 판에서 옳고 그름, 맞고 틀림, 그리고 좋음과 나쁨을 잘 가늠할 수 있겠는가? 유일하게 작동하는 혹은 강제되고 있는 분별은 누가 적이고 동지냐는 것이지, 옳고 그름 등이 결코 아니지 않은가? 다시 묻자. 그럼 적과 동지에 대한 분별은 과연 현명함일 수 없다는 말인가? 누군가의 말처럼 정치의 근원이 적과 동지를 구분하고 결정하는 것인데 말이다. 이런 항변은 속류적 관점의 차원에서 너무나 일반적인 것인 데다, 우리가 접하고 있는 대내외적 정치의 압도적 현실이기에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다시 또 물어야 한다. 적과 동지를 맞게 구분했냐고, 또 그것이 옳고 좋은 행동, 즉 바람직한 결과를 낳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