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과 정치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준 양질의 정치인
노회찬의 생전과 사후
필적하는 정치인 보지 못해
그의 사후 유독 도드라진
사익 추구와 반지성주의 등
디스토피아적 현실에 대비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 끌어
그의 정치적 생애를 읽으며
인류애적 삶의 정신 계승한
다른 차원의 진보정치 꿈꿔
‘병’을 앓고 있다. 노회찬, 그가 떠난 후 발병했고 지난 5년간 계속 악화되어왔다. 현실의 정치가 시시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병이다. 정치 현실에 대한 판단을 중지한 채 마주한 빈 벽에 눈길을 두고 아무 말 없이, 어떤 몸짓도 없이 거실 소파에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게 하나도 힘들지 않다. 짐작하건대, 나 말고도 그가 떠난 후 이런 증상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염원과 열정과 의지를 가졌던 사람들이라면. 이들에게 노회찬의 삶과 죽음은 본인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함께했던 자신들의 것이기도 했으니.
<노회찬 평전>이 나왔다. ‘미디어오늘’과 ‘진보정치’ 등을 만들었던 진보언론인 출신의 이광호 작가가 장장 4년에 걸쳐 집필했다. 나는 노회찬재단의 평전기획위원으로 참여했기에 지고지난한 집필 과정을 지켜보았다. 여러 차례 제출된 초고들도 함께 검토했다. 그것만으로도 벅차고 힘겨웠다. 수배와 투옥은 물론, 목숨마저 내걸며 함께했던 많은 이들의 애환과 기억이 담겨 있는 ‘공인’의 삶과 죽음을 다루는 책을 쓴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최종 원고를 받아들고서 작가에 대한 감탄과 경이로움에 빠졌다. 노회찬의 오랜 벗이자 언론인 출신인 김창희 위원장을 비롯해 열과 성을 다한 평전기획위원들이 있었지만, 긴긴 집필과 출판 과정에서의 두려움과 외로움과 긴장감은 오롯이 작가의 몫일 수밖에 없으니 더욱 그러했다. 이런 점에서 <노회찬 평전>은 내게 노회찬의 발견만이 아닌 ‘이광호의 발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출판본을 펼쳐 읽을 수 없었다. 평전기획위원이 아닌 독자 입장에서 ‘편히’ 읽어야지 하며 따로 주문해 받아놓고서는 거실 서재 탁자 위에 놓인 책을 그저 바라만 봤다. 몇날 며칠을 그리했다. 편히 읽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책을 읽는 순간 다시금 노회찬의 부재감이 엄습하면서 ‘숨이 막힐 것 같은 그리움’에 빠져들지 모른다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런 끝에 전화해 목소리를 들어야 하고, 만나서 술잔을 나눠야겠다며 그의 부재를 부정하는 ‘착란의 고통’, 혹은 그런 ‘착란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강박감’에 빠져들 것 같다는 두려움에 직면했다. <노회찬 평전>은 출간 직후 내게 그런 책이었다.
그런 나날이 몇 차례 찰나의 계기를 통해 사라졌다. 마음이 진정되었고 책을 펼쳐 읽을 기운이 서서히 생겨났다. ‘사회적 위험 연구팀’에서 만난 대중운동 이론가인 김정한 박사가 출간 직후 나에게 “아직 <노회찬 평전>을 못 읽었네(빨리 읽어봐야겠네)”라며 말을 건넸을 때, 노회찬재단의 박규님 운영실장이 노회찬의 아내이자 동지였던 “김지선 선생이 책이 잘 읽힌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을 때, 동료 정치학자이자 북유럽 복지국가와 정당정치 연구자인 나의 아내 장선화 박사가 덤덤하고 진지하면서도 부드럽게 아이를 어루만지는 표정으로 책을 집어들고 읽는 모습을 봤을 때, 진보 이념과 정치운동 이론가이자 집필가인 장석준 정의정책연구소장이 쓴 ‘6공화국 체제하의 시민’이라는 관점에서 노회찬의 정치적 생애의 의미를 조명하는 독후감을 읽었을 때,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열린 북 콘서트에 나의 지인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참여하는 것을 봤을 때 책을 읽을 기운이 생겨남을 감지할 수 있었다. <노회찬 평전>은 사람과 사람이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면서 읽을 힘을 주는 책이 되었다. 뭇 사람들이 어우러져 함께하고 있기에 읽을 힘을 낼 수 있는 책 말이다.
다시 읽는 ‘정치인 노회찬’
그런데, 곧 물음이 ‘자동적’으로 이어진다. 왜 <노회찬 평전>은 그런 책일 수 있을까? 일상의 습관적 독서와 감상을 넘어서서 정치적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고약한 직업병이 도진다. 내친김에 그가 떠난 후 생긴 병 - ‘정치우울증’ - 을 치유해보자는 욕심이 발동한 탓일 수 있다. 물음에 대한 답은 작금의 정치경제체제에서 삭제 완료되었다고 여겨진 ‘유토피아 모멘트’의 복원 가능성, 적어도 복원 의지를 재점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의 생성이다.
난 감히 말하건대, 노회찬의 생전과 사후를 통틀어 그에 필적하는 정치인을 본 바가 없다(그가 함께하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정치인들은 있었다. 돌이켜보면 노회찬은 대체로 그런 이들과 대화하고 협력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저런 인연과 방식으로 대권 주자를 비롯한 꽤나 저명하고 유력한 정치인들을 만나 대화도 나눠보고 행보를 지켜보기도 하면서 내린 결론이다.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의 깊이, 약자에 대한 존중과 애정의 진정성과 크기, 동지에 대한 믿음과 예스러운 태도의 견지, 현실과 이상의 긴장과 간극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좁히고자 하는 의지의 강도, 이념 그 자체의 구현이 아닌 실제 삶의 고통 해소와 행복 추구의 기반 조성에 초점을 맞춘 비전과 전략의 꾸준한 모색 등의 차원을 두루 봤을 때의 결론이기도 하다. 그는 그야말로 품격을 갖춘 양질의 정치인이었다. ‘좋은 삶과 정치’라는 게 무엇인지, 그것을 살아내고 실행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몸소 보여준 정치인이었다. ‘자신을 꾸짖고 세상을 바로잡아 널리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는 정치(政治)의 본뜻을 험악한 현실 정치판에서 구현해낸 정치인이다. 이광호 작가가 책을 쓰면서 “종전에 알았던 것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고 정치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 이유다. <노회찬 평전>은 그런 고백의 타당성에 대한 ‘실증’이다. 위인전도 아니고 전기도 아닌 평전이 작가와 독자들에 의해 그리 자리매김되는 이유는 그 실증의 유효성에 대한 인정과 공감에 따른 것이다.
‘유토피아 모멘트’를 꿈꾸며
신기한 건 통상 그런 모범생을 다룬 책은 평범한 우리와 너무 다르다고 느껴져 재미도 없고 가독성도 떨어지기 마련인데, <노회찬 평전>은 그렇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 역시 유토피아 모멘트에서 답을 찾고 싶다. 단, 나의 밖에, 그것도 너무 먼 곳에 있는 게 아닌, ‘내 안에 혹은 내게 이미 가깝게 다가와 있었던 유토피아의 실재 가능성이라는 역설’을 감지시켜줬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좋은 정치라는 이름의 유토피아’,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우리 자신과 시절에 대한 기억, <노회찬 평전>에 담겨 있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그의 사후 유독 도드라지고 가시화된 디스토피아적 현실에 대비되어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을 끈다. 사익 추구와 반지성주의 정치의 만연, 반(反)복지·반(反)노동 정치사회세력의 독주, 대외정세의 군사화와 편승세력의 (재)주류화 등의 현실은 자연스럽게 평등과 노동 존중과 평화를 향한 유토피아 모멘트에 대한 그리움과 열망을 키운다.
난 노회찬이 대통령 혹은 내각의 수반이 되어 그와 함께하는 세력이 대한민국의 국정을 이끄는 것을 보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촛불동맹·협치 정부’의 총리는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그걸 실현하기 위한 구상과 실천을 모색하고 도모코자 했다. 진보정치는 - 진보정당의 단독 집권이 아니라 - 그런 방식의 국정 참여 경험 보유와 역량의 발휘에 따라 구현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그가 떠난 후 현실 정치에서 눈길과 마음을 거둔 것은 병이 아니라, 아주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태도였을지 모른다. 그가 떠나가는 길에 “당당히 가라”고 했던 정의당이 사람들에게 미움마저 받기 시작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지금, <노회찬 평전>을 - 다시 그의 정치적 생애를 - 읽으며 난 다른 꿈을 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예전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진보정치의 가능성이라는 유토피아 모멘트의 조성 말이다. 진보라는 이름표를 지워도 진보적인 정치에 대한 상상, 기성 정치 질서로의 진입과 그 안에서의 세력 확장만이 아닌, 그것을 에워싸는 분권과 자치와 공유의 테두리를 지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는 정치, 노회찬 생전의 정치운동이 아닌, 그의 자기애적·인류애적 삶의 정신을 지금과 이후의 세계에 맞게 계승하는 또 한 번의 유토피아 모멘트 창출을 위한 정치 말이다. <노회찬 평전>은 그것을 위한 시야 확장의 감각에 대한 주문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