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보수에서 새 진보의 실마리 찾기(1)

[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 진정한 보수에서 새 진보의 실마리 찾기(1)

미래 새 정치의 길을
러셀 커크 ‘보수의 정신’서
추리려는 이유는 두 가지다

보수의 진짜 속내서
거짓 보수를 제압할
근거를 찾는 게
효과적일 것이란 생각과
새로운 정치는
보수와 진보의
공통성서 온다는 자각 때문
균형과 조화는
적대를 양산하고
증폭시키는 차이가 아닌
서로 다른 것들이 갖는
같음의 발견에서 온다

“빈곤이 아니라 확신과 소속감이 대중을 이끌어 전체주의 정당을 지지하게 만든다. (중략) 하루 세 끼의 식사가 존재하든 안 하든 간에 심지어 단순히 직업이 있든 없든 간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지는 않는다. 결정적인 이유는 준거의 틀이다. (중략) 개인이 직접 속한 사회가 소원하거나 목적이 없거나 적대적이 되면, 사람들이 모두 차별과 배제의 희생자라고 느낀다면, 세상의 모든 음식과 직업이 있다 해도 그들을 막지 못한다.”(러셀 커크, 이재학 역, <보수의 정신>, 2018, 지식노마드, 769쪽 중에서)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이 유행한다. 인류문명과 그것을 이루는 인간의 공동체적 삶의 총체적 실천인 정치에서도 꺾이지 않는 마음은 중요하다. 부서지면 다시 세우고, 세우고 나서는 끊임없이 매만지며 다듬어야 한다. 그래야 안팎에서의 붕괴와 파괴의 위협에 맞설 수 있다. 또 ‘오래된 미래’를 찬찬히 살펴 영감을 얻고 새로운 방도를 찾아내 존중받는 인간의 삶을 영위하며 저마다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공동체적 질서를 벼리거나 존속시킬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현실을 바라보는 상당수 사람들의 마음은 철지난 봄꽃 모가지처럼 부러지고 무너져 땅바닥에 처박힌 것 같다.

올봄 평소 인연이 깊은 정치 활동가와 사회운동가 몇몇이 부러 시간을 잡아 학교로 찾아왔다. 지금 당장의 정세, 특히 여야를 비롯한 현실 정치세력들 간에 벌어지는 쟁투와 공방에 대해 논하자고 할까봐 부담스러웠다. 마침 50대 중반에 다가가는 데다 정치현실에 대해 판단을 중지한 채 지냈고, 당분간 그런 태도를 견지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숲에서 길을 잃으면 걸음을 멈추고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격언을 내세웠지만, 그건 핑계에 불과하고 그저 지금의 정치와 (심지어 정치학하고도) ‘헤어질 결심’을 세우고픈 마음 때문이었다. 작년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현 정권이 등장한 이후의 정치 상황을 접하며 특히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찾아온 그들 ‘모두’ 그랬다. 정세를 논하거나 현실 정치세력에 대한 논평을 펼치거나 들으려고 찾아온 게 아니었다. 그들도 현실 정치에 대한 기대를 저버렸음을 물론이고, 나아지게 만들기 위해 당장 뭔가 해야 한다는 투지를 ‘버린’ 상태였다.

꺾인 마음만 늘어놓고자 했으면, 이 소중한 지면에서 그들 이야기를 굳이 늘어놓을 필요가 없다. 그들이 찾아온 이유는 ‘지금 너머’의 정치에 대해 살펴보자는 것이었다. 작금의 정치 현실을 넘어서서 미래의 새로운 정치를 구상하기 위한 상상력과 그것의 유·무형적 기반을 마련해 꺾이지 않을 마음의 힘을 회복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들을 만났던 당시에는 주로 듣느라 미처 피력하지 못했으나, 미래 정치 구상의 출발을 위한 ‘작은 조각(앨버트 허시먼의 말을 빌리면, 프티 이데petit idee - 작은 생각)’을 러셀 커크(1918~1994)가 <보수의 정신>(Conservative Mind 1953)에서 들려준 ‘준거의 틀’이라는 문제에 우선 초점을 맞춰 시작해보고자 한다.

커크 ‘준거의 틀’서 새 정치 퍼즐

나는 서두에서 문장 하나를 인용했다. 미국의 저명한 사상가로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후 삶의 대부분을 대학 제도 밖의 ‘독립지식인’으로 살았던 러셀 커크가 쓴 <보수의 정신>의 한 대목이다. 러셀 커크는 미국의 유력 ‘보수주의 사상가’였다. 오해하면 안 되는데, 주말이면 광화문광장에 태극기를 들고나와 누군가를 ‘좌익빨갱이’라고 주장하며 궤멸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런 유의 ‘가짜’ 보수주의자(사실은 자기 삶의 준거 - 반공개발독재 시대라는 ‘시간의 고향’ - 를 잃어 상처받은 영혼과 극우세력의 반지성주의적 행태에 포획된 자)가 아니다. 러셀 커크는 근현대 문명을 본격 꽃피운 18세기 이후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200여년의 시간에 걸쳐 수행한 보수주의자들의 고뇌 어린 사색과 논의를 통찰함으로써,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 혹은 공산주의라는 이름을 얻어가며) 가정과 지역공동체와 같은 사회의 뿌리와 전통을 파괴한 근대 정치·경제 혁명의 부조리와 병폐를 치유하고 극복할 원리를 찾고자 한다.

러셀 커크는 우리가 절실하게 존재의 지속성과 방향 감각을 갈구하지만 거부당했다면서, 그 이유를 가정의 쇠락, 옛 직능 단체의 말살, 중앙 집중화된 국가에 따른 지역정신의 후퇴, 버려진 종교적 믿음이라는 조건들에서 찾았다. 이때 주목할 것은 이와 같은 전통 사회의 혁명적 파괴 - 대량산업주의 - 에 따른 가장 두드러진 결과를 ‘고독한 군중의 창조’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그 군중은 진정한 공동체가 없는 개인의 거대 집단이다. 이들은 서로에게 관심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종종 자기만이 자신의 관심사라고 확신한다. 이들은 옛날 형식의 경제적 방법론, 가정의 권위, 작은 정치 공동체에 가해진 공격 때문에 개인으로 해방되었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때 얻은 자유는 공포와 다름없는 것으로 버림받은 아이의 자유에 불과하다. 러셀 커크는 이런 ‘부정적 자유’로 인해 혼란스럽고 분노에 찬 군중은 그 반동으로 그들의 고독을 위로해주겠다고 약속하는 광신주의에, 공산주의나 파시스트에, 기성체제에 맞서는 광신적 저항에, 그리고 미망으로 가득한 전체주의 국가에 몰려간다고 말한다.

21세기의 5분의 1 지점을 경과하고 있는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정당과 의회와 같은 근현대 민주주의 제도의 형해화와 극우 포퓰리즘 발흥의 와중에 최근 들어 맞이한 팬덤 정치의 현실이 그렇다. 사람들을 ‘초연결대중사회’라는 미명하에 홀로된 자기에 집착하고 외양(심지어 푸틴 러시아 대통령처럼 몸뚱어리)의 근사함을 미디어망을 통해 과시하며 그저 타인의 선정적 관심을 끌어 ‘돈과 영향력’을 얻는 데 몰두하게 만들고, 결국은 그런 풍조에서 기성의 정치경제적 지배세력이 이득을 얻는 데 속수무책인 현실도 떠오른다.

그의 처방은 자발적 조직 재건·공급

이런 현실에 대한 러셀 커크의 처방은 결코 새롭지 않다. 지역정부, 장인조합, 교회 등과 같이 인간과 인간을 묶어주고 공동체 감각을 풍부하게 만들어주었던 자발적 조직들을 재건·공급하는 것이다. 바로 이 자발적 조직들이 사람들을 혼란과 공포와 분노와 광기에서 끄집어내줄 준거의 틀이다. 그런데 우리가 새로이 귀 기울일 부분은 그와 같은 처방책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처방책으로 제시하는 이유이다. 인간의 가장 구석진 부분의,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을 다루기 위함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가장 구석진 부분의 문제들은 자발적 조직과 같은 공(public)과 사(private) 사이의 중간자적 존재인 사회적 결합체(코먼스 commons)에서의 관계 맺음과 그 감각을 통해서 - 이해와 오해의 여부를 떠나 - 포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 삶의 구석구석은 공과 사가 찌그러지고 부서진 채로 겹치고 섞여 각각의 형체를 구분하기 어려운 일들로 채워져 있고, 실제로는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한 공과 사로 나누어 쉽게 잘라낼 수도 없다. 그렇다고 삶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그런 곳도 아니다. 뭐라 딱히 형언할 수 없기도 한 희로애락으로 가득 차 있는 생과 사의 근저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하건대, 러셀 커크의 생각은 새롭지 않다. 자발적 조직과 같은 코먼스와 자치의 중요성은 물론 인간 삶의 구석에 대한 천착은 보수가 아닌 진보라고 불리는 텍스트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도 미래의 새로운 정치의 길을 그의 보수의 정신에서 추리려는 이유가 있다. 두 가지다. 하나는 보수의 진짜 속내에서 거짓 보수를 제압할 근거를 찾는 게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정치는 보수와 진보의 차별성 혹은 그중 하나의 우월성에 대한 추종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공통성’에서 온다는 자각 때문이다. 균형과 조화는 적대를 양산하고 증폭시키는 차이가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갖는 같음의 발견’에서 온다. 지금은 그 여정을 시작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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