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보수에서 새 진보의 실마리 찾기(2)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 진정한 보수에서 새 진보의 실마리 찾기(2)

현 집권세력과 민주당에 ‘하나의 국민’ 같은 디즈레일리의 정치적 상상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 우리는 오지 않은 고도를 또다시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공리주의의 건조한 핵심을 고매한 훈계의 불꽃으로 태워버릴 디즈레일리 같은 정치가를 고대한다

‘김남국 코인 사태’는 정치인도 물질주의와 사익추구의 강화 경향에 지배당하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전수 조사하자는 주장에 정치권이 머뭇거리는 것을 보면 그 확신은 타당한 것일 수 있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정치인도 물질주의와 사익추구의 강화 경향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문장은 그러지 않아야 한다는 가정을 담고 있다. 즉, 정치인은 물질주의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이해갈등 조정의 힘인 권위를 얻을 수 있고, 그 기반인 신뢰를 쌓을 수 있다. 어느 원시 부족의 늙은 족장에게 젊고 힘센 전사들도 복종하는 이유가 바로 신뢰에 기반한 권위, 즉 ‘진정한 리더십’ 때문이라고 하고, 그것이 ‘무소유’에서 나온다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어떤 현상을 두고 경향에 지배당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은 작금의 사태를 특정 개별 정치인의 문제로 보지 않아야 한다는 관점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김남국 코인 사태는 ‘세태’다. 나는 이러저러한 사적 공적 자리를 통해 여러 번 보고 들은 경험이 있다. 지금의 세계에서는 정치인이 부를 좇는 걸 이상하게 볼 게 아니며, 오히려 금융자산 축적과 증대에 밝아야 하고 그게 더 진보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정치인과 그 주변의 전문가들을. 나는 그런 주장을 탐욕을 정당화하는 궤변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인의 자산 축적과 증대가 민생 개선과 같은 공익 증진에 효과를 내는 것을 본 바도 들은 바도 없기 때문이다. 또 학력과 부동산 등의 자산을 보유하지 못한 채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서민층의 경우에는 여전히 금융 자산 축적과 증대의 기회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제활동인구(2923만명, 통계청 2023년 4월 기준) 중 거의 절반(1440만명, 한국예탁결제원 2022년 기준)과 올해 3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밝힌 바처럼 성인 인구 16% 정도(약 640만명)에 달하는 많은 사람들이 주식과 가상자산에 투자를 한다. 하지만 가상자산의 경우 싱가포르 기반 업체인 트리플에이(Triple-A)의 통계분석에 따르면, 2021년 기준 투자자 82%가 대학 수준의 교육을 받았으며 32% 이상이 월 급여 10만달러 이상을 받는다. 보유 주식 수는 서울 강남 거주 50대 남자(11억4000만주), 40대 남자(8억3000만주), 경기 성남시 거주 40대 남자(3억7000만주) 순으로 많다. 즉 학력, 소득, 지역 등을 볼 때 주식 및 가상자산 투자는 기본적으로 ‘자산 보유자들의 게임’이다. 보유 자산에는 투자시장 안팎에 걸친 정보 및 인적 네트워크도 포함되어 있다. 직접 투자자 10명 중 7명이 최근 2년간 손실을 보고(한국리서치 2022년 6월 기준), 투자자의 40~50%를 차지한다는 ‘영끌 MZ세대’가 가장 많이 손해를 본 계층으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도 야도 ‘고매한 상상력’ 결여

자산 증식의 기회 보유 여부와 투자 손실의 유무와 정도를 개인의 능력 혹은 운의 문제로 몰고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인이라면 그리해서는 안 된다. 정치는 전체 사회의 질서와 그것을 추구하고 지탱하는 가치와 원칙을 문제 삼는 실천이다. 정치가 그리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그런 실천을 가리켜 정치라고 하는 것이다.

정치인도 투자자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개인이라 부르며, 시장에 나가 보통 사람과 경쟁한다면 정치는 설 자리가 없어진다. 자신이 투자경쟁에 직접 나서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문제가 남는다. 아니 더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사회 전체에 걸쳐 만연하고 있는, 이제는 정치인과 공직자마저 지배하는 물질주의와 사익추구 강화 경향을 방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소수의 특권층만 구현할 수 있는 탐욕과 그것을 개인의 문제임을 내세워 정당화하는 궤변이 다시금 새어 나온다.

작금의 상황에서 정치를 논하고 행하려면 물질주의와 사익추구 경향이 갖는 해악의 이유에 대해 살펴야 한다. 그래야 소수가 유리하고 다수가 손해를 보는데도 개인의 책임으로 몰고 가는 게임과 규칙을 제어할 필요성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난 그 해악의 이유를 러셀 커크의 <보수의 정신>이 선보인 ‘자유주의 비판론’에서 찾고자 한다. 특히 영국 보수당의 아버지로 불리며 총리를 지냈던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관점에 기대고자 한다. 한국에서 보수는 물론, 진보임을 자처하는 자들마저 실상은 커크와 그가 불러낸 디즈레일리가 비판하는 ‘자유주의의 그물망’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물질주의와 사익추구의 경향 강화를 정당화하는 그물망에. 커크에 따르면 이 그물망에는 이름이 있는데, ‘고매한 상상력의 결여’가 바로 그것이다.

커크가 주목한 디즈레일리는 흥미롭게도 동시대 영국에서 살았던 카를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기치로 내건 벤담의 공리주의에 기댄 자유주의를 ‘낡은 질서의 몸체에 붙어사는 기생충’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자유주의 스스로가 부인하는 귀족적 충성 같은 전통적 정치질서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보자면 기득권층의 지배에 대한 수용을 조건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자유주의는 마르크스의 평등과 같은 미래 목적의 구현이나, 디즈레일리의 사회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권리와 의무의 위계질서의 복원 같은 가치와 질서에 대한 상상력을 가질 수가 없다. 그래서 결국 자유주의는 -자기 자신에 다름 아닌- 기득권층의 지배로 귀결될 개인주의와 물질적 성공만이 최고라는 철학적 분위기에 머물게 된다.

‘상상력의 힘’ 있는 정치 기대한다

커크는 디즈레일리가 탐욕스러운 산업주의와 사회를 파고드는 벤담주의 철학이 없애버린 것들을 인류에게 되돌려 주려 했다면서, 그 도구로 내세운 것이 ‘상상력의 힘’이었다고 말한다. 그 상상력의 힘을 발휘해 추진한 것이 바로 ‘국민공동체(하나의 국민·One nation)’다. 디즈레일리는 마르크스처럼 계급이론을 제시했으나, 계급 간의 진정한 이해는 서로 적대적이지 않다고 선언하고 계급 간 이해는 국가의 복지라는 측면에서 하나로 묶인다고 했다. 그의 정치적 목적은 계급 간의 조화로 가난하고 부유한 두 개의 영국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각 계급에 승인되고 균형 잡힌 고유의 특권이 있기 때문에 공동체의 모든 중요한 이해 집단은 국가의 모든 일에 자신들의 견해를 반영할 수 있다고 했다. 자유는 바로 그런 계급 간의 균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디즈레일리는 엄존하는 계급 차별을 ‘원자화된 개인 간의 평등’을 내세워 무시하고 은폐하면서 국민공동체라는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혐오하는 자유주의와도, 질서의 근간인 계급의 철폐를 외치는 사회주의와도 다른 길을 바라봤던 것이다.

커크는 디즈레일리가 진정한 평민들, 즉 선거권이 없고 유산을 상속받지 못한 하층 계급들을 불행에서 구해 문명공동체로서의 국가공동체를 건설해냈다고 평가한다. 공리주의적 이기심과 개인주의를 거부하고 공동체를 되살리기 위해 하층계급들이 잊혀지지 않고 있으며, 사회의 지도자들은 일반 대중들과 공통의 이해를 지녔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확신시켰다는 것이다.

디즈레일리는 노동계급이 땅이나 자본 등 지킬 게 없기 때문에 보수당을 찍지 않을 거라는 주장에 대해 비판하고 반박하기도 했다. 그런 주장은 세상에 고귀한 것은 땅과 자본밖에 없다는 시각을 담은 것에 불과하며, 노동자들에게는 자유, 정의, 신체와 가정의 안전, 법의 평등한 집행, 자유로운 노동도 있다고. 그리고 이러한 ‘특권’들은 보호할 만한 가치라고.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서 자유를 최고 가치로 내세우면서도 노동배제라는 개발독재 시절의 전통에 기대고 있는 현 집권세력, 진보로 불리면서도 금융자산 증식에 몰두하며 물질주의의 추종과 사익추구 시비에 연이어 휘말리는 제1야당. 그들에게 하나의 국민과 같은 디즈레일리의 정치적 상상력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터이다. (결국 오지 않은) 고도를 (또다시)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커크의 표현처럼 공리주의의 건조한 핵심을 고매하고 아름다운 훈계의 불꽃으로 태워버릴 디즈레일리 같은 정치가를 말이다. 디즈레일리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상상력에 호소할 때 인간은 가장 매혹적”임을 아는 정치가 말이다.

■김윤철

경희대 교수 및 실천교육센터장.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세계와 시민’ ‘정치의 인문학적 탐색’ 등의 과목을 가르친다. 참여사회연구소 부소장, ‘시민과 세계’ 편집위원,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소장, 노회찬정치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정당> <헬조선 3년상> 등의 저서와 ‘노동존중 정치와 노회찬의 6411정신’ ‘한국 불평등 민주주의의 정치사적 기원’ 등의 논문이 있다.



Today`s HOT
올림픽 성화 도착에 환호하는 군중들 러시아 전승절 열병식 이스라엘공관 앞 친팔시위 축하하는 북마케도니아 우파 야당 지지자들
파리 올림픽 보라색 트랙 첫 선! 영양실조에 걸리는 아이티 아이들
폭격 맞은 라파 골란고원에서 훈련하는 이스라엘 예비군들
바다사자가 점령한 샌프란만 브라질 홍수, 대피하는 주민들 토네이도로 파손된 페덱스 시설 디엔비엔푸 전투 70주년 기념식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