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수
편집인·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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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 칼럼 ‘지·포·대’ 윤석열 vs 차별화 급한 한동훈 동화 속 ‘벌거벗은 임금님’이 저랬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정브리핑·기자회견을 한 지 닷새째, 세상엔 조소(嘲笑)와 분통이 쌓여간다. 지금 응급실 뺑뺑이, 진료 셧다운, 격감한 장기이식 수술은 숫자로나마 잡히는 쪽이다. 병원 가는 고통·설움이 저 난리인데, 대통령은 고개 숙이고 말이나 말지, 원활하다고 염장 질렀다. ‘바보 소리’ 듣고 말 작정이었나. 광복절 대혼란을 겪고도 뉴라이트를 “모른다” 했고, 내수·세수·가계빚·집값 빨간불인데 “경제가 살아나고 있다” 했다. 대통령 전화 후 180도 바뀐 채 해병 수사는 외압 없는 게 “드러났다” 설레발치고, 정기국회 코앞에 협치는 또 퉁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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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 칼럼 대통령다움, 그 무거움에 대하여 윤석열 정부 출범 다섯 달 뒤다. 2022년 10월, 홍준표 대구시장이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검사 곤조(근성)를 빼야 제대로 된 정치인이 된다.” DJ 저격수로 정치를 시작한 그도 그걸 빼는 데 국회의원 3선, 8년이 걸렸다고 했다. 상대 약점만 좇고, 물면 놓지 않고, 한번 당하면 잊지 않고 되갚아주고, 사과를 모르고, 선악으로만 보는 정치를 ‘검사의 곤조’라 했을 게다. 당시 법무장관 한동훈을 겨눴겠지 싶으나, 2년이 흘러 ‘검찰국가’와 ‘검사 대통령’을 반추해도 정곡을 찌른다. 세 번의 분기점이 있었다. “승자독식 없다”며 국민통합 화두를 던진 집권 초, “국민은 늘 옳다”며 여당에 교훈을 찾으라 한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저부터 민심을 경청하겠다”고 한 4·10 총선 참패가 그것이다. 그 후는 본 대로다. 쇄신을 삼세번 약속하고, 대통령은 달라지지 않았다. 집권 27개월, 국정 최고지도자의 ‘존재 이유’를 잊고, ‘대통령다움’을 뭉갠 네 장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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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 칼럼 윤석열의 ‘난세’, 나라가 다 섰다 6·15와 6·25. 한반도 평화와 전쟁을 상징하는 두 날이다. 2000년 6월15일 남북 정상의 첫 회담이 열렸고,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터졌다. 북 탱크가 밀고 내려온 개성·철원·금강산 길은 50년 뒤 경협·관광·이산상봉 길이 되었다. 지금, 그 육로엔 지뢰가 재매설되고, 철도 침목이 뽑히고, 벽이 쳐지고 있다. 그 하늘로는 전단·오물 풍선·확성기 소리가 오간다. 핫라인 끊기고, 두 적대국이 험담하며, 9·19 군사합의는 파기됐다. 6월 한반도는 ‘정전(停戰)의 땅’으로 되돌아갔다. 안보뿐인가. 민초들의 아우성이 차오른다. 금사과·금배가 가을까지 간다더니, 귤·복숭아·김에도 ‘금’자가 붙었다. 삼겹살 2만원이 뚫렸다. 버스·택시·난방·전기요금 다 올랐다. 물가·전셋값 뛰니, 씀씀이 줄고, 일자리·소득도 마르는, 참 모질고 긴 불경기다. 자영업자 대출 연체율이 최고치로 치솟고, 한우 농가는 ‘소 반납 시위’를 잡고, 더워지는 바다에 양식장은 잠 못 잔다. 어찌 살라는 건가. 안전하고 먹거리 많은 곳에 새는 둥지 틀고 알을 낳는다. 사람도 다를 리 없으나, 오늘 이 땅은 그렇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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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 칼럼 ‘검찰 정권’의 균열이 시작됐다 전고후저(前高後低). 시청률도 이럴 게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2주년 기자회견을 보다 말았다는 이가 많다. 국정 방향은 옳다고, 그래도 특검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디올백 선물에 ‘박절하지 못한’ 아내는 ‘현명하지 못한’ 이로 바뀌었다. 달라진 게 없구나! 사람들은 TV를 껐다. “채 상병 사건 수사에 격노했느냐.” “이종섭 국방장관에게 전화했느냐.”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 전언대로, 대통령에게 물어야 할 즉문즉답 두 개는 빠진 휑한 회견이었다. 달라진 것도 있다. 총선 참패 한 달 만에, 대통령은 민정수석을 부활시켰다. 2022년 3월, 당선인 윤석열이 제왕적 대통령의 잔재라고, 그 자신도 피해자였다고, 용산 시대는 달라지겠다고 청산한 그 ‘왕수석’이다. “합법을 가장해 정적을 통제하고, 세평 검증을 위장해 국민 뒷조사를 했다”고 없앤 조직을 2년 만에 그대로 되살린 것이다. 대통령은 “민심 청취”를 앞세웠다. 지나가는 소도 웃는다. 시민사회수석이 그대로 있고, 언론 사설과 여론조사가 쏟아지는 세상이다. 둘러댄 것이 민심 청취라니, 그 민심은 대통령이 ‘따로 듣고픈 말’인가, ‘따로 하고픈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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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 칼럼 윤석열과 지는 벚꽃이 닮았다 표는 준엄했다. 108 대 192. 보수여당이 대참패했다. 1988년 ‘1노3김’이 겨룬 13대 총선 이래 여당 지역구 의석이 처음 두 자릿수(90석)로 쪼그라들고, 그 의석마저 셋 중 둘은 영남(59석)이었다. 2년 전 대선에서 이긴 한강·금강에서 완패하고, 낙동강과 서울 강남에서 명줄만 부여잡았다. 중대선거구제와 비례제 확대를 반대한 여당은 누굴 탓할 것도 없다. 윷 던지듯 한 소선거구 진검승부에서 ‘모 아닌 도’를 잡았다. 그 투표함이 까진 4월10일 밤, 한국 정치는 또 한 번 개벽했다. “왜 저리 막 던질까.” 대통령이 총선용 감세·토건 공약을 나날이 쏟아낼 때다. “질 거니까.” 이 문답에 술자리에선 실소(失笑)가 터졌다. 정권심판론이 그리 컸고 이심전심으로 굴렀다. 허겁지겁 용쓰다 만 여당은 논외로 두고 그 심판의 시작과 끝, 오롯이 ‘윤석열’이다. 집권 2년 패인이 ‘디올백·런종섭’뿐일 리 없다. 검사 정치, 입틀막 정치, 이념 정치, 야당·비판언론만 수사·감사·검열한 권력사유화, 편 가른 인사, 사과 없는 만기친람 국정의 울화와 냉소가 ‘윤석열’로 집약됐다. 대통령은 굳이 비쌀 땐 국과 계란찜에 넣어 먹지 않는 게 대파란 것도, 그래서 그 소동에 서민들이 더 서러웠던 것도 몰랐을 게다. 귀 닫고 기세등등 폭주하던 윤석열차를 총선이 세웠다. 민심의 철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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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 칼럼 더 늦기 전, 이재명은 청룡언월도를 들라 총선 공기가 달라졌다. 설 전후 더불어민주당·국민의힘 지지율(한국갤럽)이 ‘35 대 34’에서 ‘31 대 37’로 역전됐다. ‘김건희 디올백’ 파장은 끝난 건가. 여론조사 전문가 3명에게 물었다. 답이 재밌다. 그렇진 않을 거라고…. 설 전후엔 지역구 공천 여론조사·발표가 많았던 여당 표가 더 반응했을 수 있다고…. 여당의 ‘김무성 불출마·김성태 낙천 수락’ 뉴스와 민주당의 ‘친명·비명·친문 싸움’ 뉴스를 대비시킨 이도 있다. 선거 공학이든 몸부림이든, 셋의 총선 평은 모아졌다. 여당 상승세, 야당 내림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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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 칼럼 ‘V2’의 디올백, 용산은 오늘도 잠 못 든다 엿새 전 새벽 2시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신평 변호사의 페이스북 자작시에 ‘좋아요’를 눌렀다. 제목은 ‘슬픔의 의미’. “이제는 나의 때가 지나갔다고/ 헛헛한 발걸음 돌리니…”로 시작하는 시다. 대선 때 일찌감치 공개 지지해 ‘윤석열 멘토’로 불린 그는 얼마 전 “임금님놀이” “수직적 당정관계” “검찰정권”이라며 대통령을 직격했다. 왜 좋아요를 눌렀지? 시가 좋다는 건가? 세상을 멀리하겠단 말이 좋았나? 그러다 사람들의 눈이 다시 꽂힌 건 새벽 2시다. 대통령은 왜 깨어 있었지? 밤에 대통령이 뭐 하고, 누구를 만나는가. 정가의 영원한 관심사다. 보고서(DJ)와 책(문재인)을 보고, 인터넷(노무현)과 드라마(박근혜)를 즐긴다고 회자됐다. 꼭두새벽에 기동한 MB는 유달리 밤 얘기는 적다. 관저에서 만난 박철언(노태우)·김현철(YS)·박지원(DJ)·유시민(노무현)·이재오(MB)·최순실(박근혜)·김경수(문재인)는 ‘당대의 복심’이다. 대통령과의 거리가 권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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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 칼럼 ‘서울민국’, 그들만의 떴다방 정치 빛의 속도로, 대한민국과 한류는 압축성장했다. 반대로, 그 속도로 무너지는 게 있다. 46개월째 주는 ‘인구’, 브레이크 풀린 ‘기후위기’, 감사원이 100년 뒤 8개 시군구만 살아남는다고 경고한 ‘지역소멸’이다. 이 세 가지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고, 다 ‘서울공화국’과 맞닿아 있다. 그 수도 서울을 집권당이 다시 넓히자고 해 시끄럽다. 이호철(2016년 작고)이 장편소설 <서울은 만원이다>를 쓴 게 1966년이다. 서울이 강남·동·서로 2.3배 확장된 지 3년 지나고, 9개 구에 370만명이 살 때다. 그 서울도 이호철은 “꽉꽉 차 있다”고 썼다. 주택청약이 시작된 1977년, 박정희 정부는 “서울의 근본 문제가 인구 집중”이라며 행정수도 구상을 내놨다. 그 꿈은 노무현 정부가 세종시에서 펼치다 “관습헌법 위배”라는 헌재 판결에 막혔다. 1992년 1093만명을 찍은 서울엔 지금 25개 구에 940만명이 살고 있다. 해도, 서울은 과집적이고 계속 블랙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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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 칼럼 강서에서, 한국 정치가 리셋된다 설은 형 집에서, 추석은 우리 집에서 지낸 지 두 해 됐다. 친지들도 여럿 모인다. 그 추석상엔 금칙을 정했다. 정치 얘기 않기로…. 소주 떨어져 슈퍼 갔다 오는 길, 어느 집에선 대낮부터 정치 언쟁이 붙었다. 툭 웃음이 터졌다. 하나, 두더지게임 같은 게 정치다. 술 한 순배 돌 때마다 “그런데~” 하며 튀어나오고, “그만요~” 하며 덮는 두 이름이 있었다. 윤석열과 이재명이다. 이재명이 기사회생했다. 한동훈 법무장관이 “증거가 차고 넘친다” 하고, 검찰이 “무기징역감”이라고 호언한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직접 증거가 부족하고, 구속이 필요한 혐의로도 안 본 것이다. 2년 가까이 서울·수원·성남 검찰이 달려온 먼지털기 수사도 제동이 걸렸다. 대장동 사건은 이제껏 ‘428억 뇌물 약정’은 기소 못하고 배임죄 ‘고의’는 비워둔 채 막 재판이 시작됐다. 이재명의 영장 기각엔 세 뜻이 담긴다. 일방향이던 ‘검찰의 시간’이 유무죄 다투는 ‘법정의 시간’으로 넘어가고, 체포동의 내상이 적잖으나 방탄 굴레는 덜었으며, 제1야당 주도권을 다시 쥐었다. 1심이든 가처분이든 영장심사든 ‘정치인 이재명’은 법원의 첫 결정이 중요했다. 새옹지마 된 9월 격동에서 이재명은 판정승, 검찰은 완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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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 칼럼 오른쪽 날개가 앞으로 가고 있는가 “제일 중요한 것이 이념이다.” 8월을 휘저은 윤석열 대통령의 말이다. 논객들의 글도 한 달째 그 말을 붙들고 있다. “국가 지향점을 이념”으로 잡은 첫 대통령이어서일 게다. 대통령은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그 맹종·추종 세력”을 반국가세력으로 틀 짓고, 그들이 자유사회를 교란시키고 반일 감정을 선동한다고 공격했다. 대통령이 곧 국가였고, 말끝은 야당·비판언론·진보적 시민사회를 겨눴다. 세상은 그날로 두 동강났다. ‘공산전체주의’는 학자들도 생소한 조어다. 이 땅에서만, 뉴라이트가 썼다. 2017년 1월23일, 뉴라이트 130여명이 ‘한국자유회의’를 출범시켰다. 2005년 수면 위로 처음 봉기한 이 집단이 박근혜 탄핵 촛불에 맞서 2차 사상전에 뛰어든 날이다. 그 선언문 해제(解題)를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썼다. 김 장관은 그때부터 “국민은 실재하지 않는 추상적 존재”라며 헌법 제1조(국민주권)에서 엇나갔다. 반(反)대한민국 세력이 조직한 광장의 촛불은 북한식·공산주의식·전체주의식 반동이고, 그와 싸우는 자유민주주의가 정치적 진보 세력이라고 우겼다. 그 후 ‘공산전체주의’를 쓰는 뉴라이트가 하나둘 늘더니, 급기야 대통령 입에까지 올랐다. 이 단체를 공동발기한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을 필두로, 정부에 둥지 튼 뉴라이트는 열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다. 일제 식민지로 근대화됐고, 해방은 미군의 선물이며, 이승만·박정희를 찬미하는 사람들이다. 그 우극단을 대통령이 품자, 이 검찰국가엔 뉴라이트 꽃도 활짝 피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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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 칼럼 윤석열의 ‘무책임장관제’ “지금부터 대한민국 중앙정부가….” 지난 4일 한덕수 국무총리의 잼버리 담화는 다급했다. 중앙·지방 정부를 갈라친 속은 바로 읽혔고, 그 자체로 유체이탈이었다. 일국의 장관 셋이 공동조직위원장, 총리가 정부지원위원장이다. 열달 전 국회에 “태풍·폭염 대책 다 세워놓았다”던 김현숙(여가부 장관), 개막 3일 전 새만금에서 “사고 없도록 최선의 준비해왔다”던 이상민(행안부 장관), 연관어 ‘청소년’을 빼면 존재감 희미했던 박보균(문체부 장관)은 다 허깨비였나. 그러곤 목도한대로다. 냉방버스가 투입됐고, 화장실 청소에 1400명이 가세했다. 새만금엔 긴급 예산 99억원이, 대원들 전국 분산에 또 수백억원이 쏘아졌다. 세수 펑크난 나라에서 무슨 일인가. 총리가 할 게 걸레질인가. 그래야 움직이는 나라가 됐나. 왜 처음부터 못했나. 이 처참한 블랙코미디에 물을 게 끝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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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 칼럼 2년째 물난리, 국가는 또 없었다 “세숫대야로 들이붓네.” 물난리 난 16일, 부여 고향 친지는 전화 너머로 “비가 무섭다”고 했다. 예부터 하늘 뚫린 큰비를 세숫대야로 비유했었다. 친지는 그땐 한나절이고, 지금은 온종일 퍼붓는다고 했다. 백마강 벌판의 논·축사·비닐하우스는 다 흙탕물에 잠겼다고 했다. 나흘간 600㎜ 쏟아졌다니 눈에 선하다. 부여 비는 많이 온 축이다. 아니어도, 이 장맛비는 셌다. 산사태가 노부부·납골당·이주노동자를 덮쳤다. 오송 지하차도에선 수몰 참사가 또 벌어졌다. 50명이 세상 뜨고, 시·군·구 110곳에 이재민 나고, 여기저기 인재라니, 수해 민심은 펄펄 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