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중요한 것이 이념이다.” 8월을 휘저은 윤석열 대통령의 말이다. 논객들의 글도 한 달째 그 말을 붙들고 있다. “국가 지향점을 이념”으로 잡은 첫 대통령이어서일 게다. 대통령은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그 맹종·추종 세력”을 반국가세력으로 틀 짓고, 그들이 자유사회를 교란시키고 반일 감정을 선동한다고 공격했다. 대통령이 곧 국가였고, 말끝은 야당·비판언론·진보적 시민사회를 겨눴다. 세상은 그날로 두 동강났다.
‘공산전체주의’는 학자들도 생소한 조어다. 이 땅에서만, 뉴라이트가 썼다. 2017년 1월23일, 뉴라이트 130여명이 ‘한국자유회의’를 출범시켰다. 2005년 수면 위로 처음 봉기한 이 집단이 박근혜 탄핵 촛불에 맞서 2차 사상전에 뛰어든 날이다. 그 선언문 해제(解題)를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썼다. 김 장관은 그때부터 “국민은 실재하지 않는 추상적 존재”라며 헌법 제1조(국민주권)에서 엇나갔다. 반(反)대한민국 세력이 조직한 광장의 촛불은 북한식·공산주의식·전체주의식 반동이고, 그와 싸우는 자유민주주의가 정치적 진보 세력이라고 우겼다. 그 후 ‘공산전체주의’를 쓰는 뉴라이트가 하나둘 늘더니, 급기야 대통령 입에까지 올랐다. 이 단체를 공동발기한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을 필두로, 정부에 둥지 튼 뉴라이트는 열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다. 일제 식민지로 근대화됐고, 해방은 미군의 선물이며, 이승만·박정희를 찬미하는 사람들이다. 그 우극단을 대통령이 품자, 이 검찰국가엔 뉴라이트 꽃도 활짝 피어버렸다.
그 여름, 독립영웅 홍범도 흉상이 봉변을 당했다. “모셔갔으면 제대로 모셔라”는 이국 땅 고려인의 울분에 고개를 들 수 없다. 국방부는 수사 외압에 맞선 해병대 대령에게 항명죄를 씌우고, 국토교통부는 대통령 처가 땅에 고속도로 놔드릴 수 있다는 망상을 접지 않는다. 일 오염수 해양 투기를 최인접국 정부가 한번 따져묻지 않고, 그걸 뭐라 하니 ‘1+1’도 모르는 미개인으로 몬다. 공영방송 옥죄고, 총선 뛰겠다는 관변단체 예산 늘리고, 국정원은 다시 빅브러더를 꿈꾼다. 대통령 말대로, 지금 대한민국은 오른쪽 날개만 앞으로 가고 있는가. 나는 X표를 친다.
이념의 난장(亂場)에 가려진 게 있다. 민생이다. 7월 생산(-0.7%)과 소비(-3.2%)와 설비투자(-8.9%)가 다 뒷걸음쳤다. 2분기 가구 실질소득 하락폭은 신기록(-3.9%)을 찍고, 세수는 7월까지 43조원이 비고, 수출은 11개월째 쪼그라들었다. 치솟은 건 추석 앞 농산물·기름 값과 4개월째 가계빚뿐이다. 500대 기업 55%는 올해 사람을 뽑지 않는다. 청년 58%는 부모와 살고, 36%만 결혼 의사가 있고, 34%는 ‘번아웃’을 겪는다. 그 총합일까. 합계출산율(0.7)은 또 추락했다.
민생이 숫자뿐인가. 둘레길·쇼핑몰 흉악범죄와 스토킹에 떨고, 국회 앞에선 교사 수십만명이 “더 죽이지 말라”고 외친다. ‘위기가구’의 생활고 비극은 송파·수원·신촌에서 전주로 이어졌다. 안전운임제가 없어져 최저시급도 못 받는 화물운전자는 과속·과적이 늘었다고 한다. 청년과 노후가 다 퍽퍽한 한국의 빈곤 곡선이 ‘쌍봉형 낙타’로 그려졌다. 그런데도 세수 펑크로 쥐어짠 새해 예산안은 노인·아동·장애인 보조금부터 싹둑 잘라 시끄럽다. 돈이 돌지 않는 나라에서 약자들은 하루를 버텨도 1년을 살 방법이 없다.
“한 1000원쯤 되지 않았나요?” 한덕수 국무총리가 국회에서 4800원까지 오른 서울 택시 기본요금을 몰라 쩔쩔 맸다. 누구나 ‘물가 퀴즈’에 당황할 수 있지만, 29년 전 택시요금에 멈춰 서 있는 총리는 심했다. 정책 신뢰가 달린 문제다. 다산 정약용이 ‘식위정수(食爲政首)’라 했고, 공자는 ‘족식(足食)’을 ‘족병(足兵)’ 위에 뒀다. 정치의 으뜸과 목표가 민생이고, 그게 흔들리면 다 흔들린다고 일깨웠다.
제1야당 대표 단식이 13일을 지났다. 국정 사과와 쇄신을 내걸었다. 일축한 대통령은 “나가 싸우라”고 장관들을 내몬다. 추석·설을 지나 총선까지 갈 대치다. 이념전이 먹힐까, 윤석열 2년의 민생 심판이 먹힐까. 열쇳말로 돌리면, 공산전체주의 대 먹고사니즘이다. 정치는 생물이다. 보수의 홍범도 내분과 수도권 역풍을 보면, 대통령의 ‘뉴라이트 이념전’은 해를 못 넘길 수도 있다. 공자와 다산이 꿰뚫어본 먹고사니즘은 끝까지 선거 줄기를 가를 게다. “못 살겠다”면 야당이고, “사는 맛 난다”면 여당이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7개월 앞 총선에 두 물음을 먼저 던진다. 다들 먹고살 만하십니까. 지금 오른쪽 날개는 앞으로 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