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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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근 칼럼 민주당·이재명이 연동형 비례제를 버리면 1990년 10월 제1야당 대표인 김대중은 집권 민자당에 지방자치제 전면 시행을 요구하며 단식에 들어갔다. 지자제를 실시하기에는 이르다는 이른바 ‘시기상조론’을 앞세워 관성적으로 반대하는 여권을 향해 최후의 결전에 들어갔다. 시민들이 당장 해내라고 요구한 것도 아니었지만, DJ는 평생의 지론을 실현할 때가 되었다고 보고 정치적 명운을 걸었다. 여소야대를 뒤집는 3당 합당으로 몸집을 불린 여당은 처음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실시해야 할, 풀뿌리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제도라는 시민의 공감대를 외면할 수 없었기에 여권은 협상에 나섰다. 김영삼 민자당 대표가 단식 나흘째에 DJ를 방문한 게 시작이었다. 그 결과, 5·16 쿠데타로 중단됐던 지방자치제가 30년 만에 부활한다. 다시 30년이 흐른 지금 지자제는 우리 정치의 근간으로 정착했다. 지방자치가 없었던들 이재명 대표가 성남시장에서 일약 정치인으로 입신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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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근 칼럼 우주항공청법이 드러낸 한국 정치의 민낯 지난 5월 한국항공우주(KAI) 등을 방문해 항공업계 현장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처음 접한 사실이 많아 적잖이 놀랐다. 조선업이 세계를 이끄는 것처럼 우리 항공산업계도 세계 4위(PwC 평가) 수준의 산업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5년 삼성항공이 바로 그 자리에서 F16 전투기를 조립 생산하는 것을 견학한 이래 엄청난 기술적 발전을 이뤄낸 것에 감개무량했다. 항공업계 관계자들은 기민하게 상황에 대응한다면 향후 30년간 이 분야 산업을 주도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거기엔 기회요소만 있는 게 아니었다. 국내 기술자들의 현장 기피가 심각했다. 해외 기술자들이라도 들여오지 않으면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자금도 문제였다. 기술력이 있는데도 자금 부족으로 부도를 경험한 기업도 있었다. 한마디로 민간이 우주산업을 주도하는 뉴스페이스 시대를 맞아 살 것인지 아니면 죽을 것인지 기로에 놓여 있다는 느낌이 엄습했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정부와 정치권이 서둘러 항공산업의 갈피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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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근 칼럼 윤 대통령, 시민의 인내력을 시험하지 마라 2023년 8월의 윤석열 대통령은 당혹스러웠다. 두번째 맞은 8·15 경축사에 이어 국민의힘 의원 연찬회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간부위원 대화, 그리고 국립외교원 60주년 기념사로 이어지는 윤 대통령의 발언은 ‘반공 전사’ 선언과 다름없었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전체주의가 대결하는 이 분단의 현실에서 공산전체주의 세력, 그 맹종 세력과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들은 허위 조작, 선전 선동으로 자유사회를 교란하려는 심리전을 일삼고 있다.”(민주평통 간부위원 대화) 불과 취임 15개월 만에 극렬 우익 이념의 전사가 돼 있다. 지난 대선 때 공개된 녹취록에서 윤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우리는 원래 좌파”라고 한 것을 떠올리면 그 급속 변신이 더욱 당혹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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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근 칼럼 이동관이 ‘공정방송’ 외치는 나라 국제부장으로 일할 때이니 2009년쯤이다. 한 후배가 “국가정보원에 다니는 친구와 저녁을 했는데, 그로부터 경악할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 직원은 술에 취하자 “우리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 너네 신문에 광고하는 기업을 찾아다니면서 광고 주지 말라고 압력을 넣고 있어.” 양심에 찔려 견딜 수 없다며 엉엉 울더라는 것이다. 그 고백이 아니라도 당시 우리 회사는 국정원과 그 뒷배인 이명박 청와대의 소행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기업 관계자들이 사석에서 줄줄이 실토한 것이다. 그 정점에 당시 청와대 대변인과 홍보수석으로 있던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가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최근 드러나고 있는 그의 행적은 당시 일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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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근 칼럼 윤 정부, 북 신호에 응답할 수 있어야 지난해 러시아 측의 기밀문서 해제로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의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났다. 가장 큰 문제는 구소련과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에 있었다. 당과 정부 내에 관료주의가 팽배해 흐루쇼프의 쿠바 핵무기 배치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군 수뇌부는 울창한 야자수 숲이 핵미사일의 이동을 가릴 것이라고 했지만, 정작 야자수는 15m마다 한 그루씩 드문드문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문제점이 확인되었는데도 흐루쇼프에게 보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고 권력자가 결정한 이상 누구도 이의 제기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소련은 물론 전 인류의 운명을 가를 위험한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러나 미국의 U2 정찰기가 이를 탐지하자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소련에 철수를 요구했고, 그 이후 과정은 다 알려진 바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종전에는 케네디의 강단 있는 대응만 칭송받았지만 이번엔 흐루쇼프의 솔직한 실수 인정과 결단이 위기를 막았다고 필자들은 평가했다(미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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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근 칼럼 노태악 위원장, 선관위를 지켜라 선관위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다. 1995년 지방선거 때 출입기자로 등록한 이래 중앙선관위 자문위원으로 있는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선관위를 취재하면서 이런 일은 보지 못했다. 더구나 이번엔 선관위 내부 문제를 계기로 여권이 손을 보겠다며 벼르고 나선 터라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선관위를 둘러싼 이번 논란을 보고 “결국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고 생각했다. 지난 수년간 선관위는 변화되는 환경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사전투표·해외투표 등 새로운 제도에 기민하게 적응하던 과거와 어딘지 달랐다. 보완을 요구하는 외부 경고에도 그다지 귀 기울이지 않는 듯했다. 도리어 선거관리에 대한 강박에 빠져 과도한 단속에 나서는 모습도 종종 보였다. 시민들에겐 무서운 권력기관으로 비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가 결국 국가정보원의 해킹 경고에 대한 대응 실패로 이어졌다. 선관위로서는 국정원의 개입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했는데 해킹 공동 점검에 미적거리다 불필요한 의심과 논란에 휘말렸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유연한 대처에 실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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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근 칼럼 남 탓과 어퍼컷으론 아무것도 못한다 16일 오전 TV로 14분간 생중계된 윤석열 대통령의 집권 2년차 첫 국무회의 모두발언을 보면서 좌절했다. “이념적 정책을 폐기하고 원전 생태계를 되찾고 있다”거나 “탈원전 정책과 방만한 지출이 한전 부실의 원인”이라는 정도는 그러려니 했다. “과거 포퓰리즘과 이념에 사로잡힌 반시장적 경제정책을 자유시장경제에 기반한 민간 주도 경제로 그 기조를 전환”한다는 대목도 그런대로 넘겼다. 그런데 “지난 정부 5년간 서울 집값이 두 배로 폭등했고 집 한 채 가진 사람은 10배 이상의 세금을 감당해야 했다”며 “집값 급등과 시장 교란을 일으킨 반시장 정책은 대규모 전세사기의 토양이 되었다”는 대목에서 걸리고 말았다. 남 탓이 목불인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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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근 칼럼 도둑을 도둑이라 못하고 미국이 용산의 대통령실을 도청했다는 뉴스가 나왔을 때 곧바로 오래전 한 장면을 떠올렸다. 1996년 군 장성 인사 직후로 기억한다. 김동진 국방장관이 기자들에게 이상한 일을 당했다고 말했다. “엊그제 미군 고위 장성을 만났는데, 나에게 한·미 군 현안에 대해 이런 말을 했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은 자신이 며칠 전 한국군 고위 장성과 단둘이 장관실에서 나눈 대화 내용이라는 것이었다. 바로 “우리 둘이 나눈 대화를 어떻게 미군이 아느냐”고 했더니 그 장성은 자신은 그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이 없노라고 했다는 것이다. 김 장관은 “그렇다면 미군이 내 방을 도청했다는 말인데…”라며 얼굴을 굳혔다. 그렇지 않아도 국방부 구청사 2층 끝에 있던 장관실은 미군 부대 쪽을 향하고 있어 안테나만 이쪽으로 돌리면 도청이 가능하다는 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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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근 칼럼 한·일 정상외교 참사, 시작일 뿐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이 촉발한 후폭풍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를 지원하는 한 시민단체는 21일 탄핵을 언급하며 퇴진을 요구했다. 시민단체의 퇴진 요구에, 또 민주당의 격렬한 비난 언어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수의 시민들처럼 외교 참사라는 데는 십분 공감한다. 윤 대통령은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했지만, 취임 1년도 채 안 된 대통령이 역사의 평가에 기대는 것 자체가 이번 외교가 실패임을 자인하고 있다. 이번 일은 현 정부의 외교 역량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먼저 실패가 예견되는데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김대중-오부치 선언과 같은 윤석열-기시다 선언이 나올 것(중앙일보)”이라고 했지만 회담 전에 이미 공동선언은 없는 것으로 결론났다. 그렇다면 윤 대통령은 방일은 하되 그에 걸맞은 외교적 행동을 준비해야 했다. 주어야 할 것을 줄이고, 언행도 더 다듬어야 했다. 그런데도 일본의 선의만 기대하며 막판까지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과의 표현을 이끌어내기 위해) 샅바싸움을 벌였다. 결과가 불투명한 데도 통크게 내주는 비외교적 선택을 했다. 현찰을 내주고 대신 지불시기도 불분명한 어음을 받은 꼴이다. 한 전직 외교관은 정상회담 후 평가를 부탁하자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윤 대통령이) 홀딱 벗어줬다”고 했다. 딱 그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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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근 칼럼 윤석열식 ‘당정 일치’의 종착역 국민의힘 지도부를 뽑는 전당대회는 자기부정의 결정판이다. 가장 확실한 사례가 윤석열 대통령이다. 윤 대통령은 20대 대선 이튿날인 지난해 3월10일 “대통령이 된 저는 모든 공무원을 지휘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당 사무정치에는 관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선거대책본부 해단식에서 한 말인데, 이보다 더 당정 분리를 확실하게 선언할 수는 없었다. 한동안은 이 말을 지키는 듯했다. 이준석 당대표와 의견이 엇갈릴 때마다 “당이 하는 일에 일일이 언급할 수 없다”거나 “바빠서 챙겨보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 슬금슬금 당에 손을 쓰더니 이번 전대에 이르러서는 노골적으로 당무에 개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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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근 칼럼 4·3 유복자, 반세기 만에 입 열다 제주의 많은 동네와 집안에서 4·3은 아직도 금기어이다. 1949년 음력 7월생, 4·3 유복자인 내 이모부 가족에게도 그렇다. 그 누구도 이모부로부터 그 비극의 전말을 들은 사람은 없었다. 3년 전 돌아가신 막내이모가 몇마디 해주지 않았다면 나 역시 지나쳤을지 모른다. 그런 이모부가 이번 설에 입을 열었다. 다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자신의 상처를 70 평생 처음으로 드러냈다. 이제는 기록으로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는 나와 사촌여동생의 설득 끝에. 이모부는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도 아버지가 6·25 난리통에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초등학교까지는 호적도 없이 무적자로 지냈다. 중학교 입학을 하면서 가장 가까운 친족인 7촌 삼촌이 이름을 짓고 호적에도 올렸다. 이때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4·3에 희생됐다는 말을 들었다. 그저 난리를 피한다고 이웃마을 처가의 광 속 항아리에 숨어 지내다 “이제는 나와도 좋다”는 말을 믿고 나왔다 인근 마을 청년들과 함께 한꺼번에 총격 피살당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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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근 칼럼 윤석열 정부 ‘노동 개혁’, 허구다 백기완 선생은 생전에 몇 차례 필자에게 언론과 언론인의 시각에 대해 비판했다.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2013년 2월, 박근혜씨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뒷날 전화로 전한 말이다.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이루겠다”는 경향신문 1면 기사 제목에 대해 왜 그렇게 보도했느냐고 물었다. 비록 인용 부호를 써 전달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그 구호에 동의한 게 아니냐는 꾸지람이었다. 두번째 기억은 백 선생과 대화 중 ‘노동자들의 투쟁 방식이 좀 더 세련되었으면 한다’는 필자의 말 뒤에 대답처럼 덧붙인 말이다. 백 선생은 사람은 먹고사는 게 어려워지면 짜증을 낼 수밖에 없다며, 그들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전쟁터에서 겨우 살아나온 장병에게 복장이 왜 그 모양이냐고 따지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었다. 2주기가 다가오는 백 선생을 떠올린 것은 윤석열 대통령이 ‘노동 개혁’을 들고나오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