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탓과 어퍼컷으론 아무것도 못한다

이중근 논설고문

16일 오전 TV로 14분간 생중계된 윤석열 대통령의 집권 2년차 첫 국무회의 모두발언을 보면서 좌절했다. “이념적 정책을 폐기하고 원전 생태계를 되찾고 있다”거나 “탈원전 정책과 방만한 지출이 한전 부실의 원인”이라는 정도는 그러려니 했다. “과거 포퓰리즘과 이념에 사로잡힌 반시장적 경제정책을 자유시장경제에 기반한 민간 주도 경제로 그 기조를 전환”한다는 대목도 그런대로 넘겼다. 그런데 “지난 정부 5년간 서울 집값이 두 배로 폭등했고 집 한 채 가진 사람은 10배 이상의 세금을 감당해야 했다”며 “집값 급등과 시장 교란을 일으킨 반시장 정책은 대규모 전세사기의 토양이 되었다”는 대목에서 걸리고 말았다. 남 탓이 목불인견이었다.

이중근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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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점 정책인 3대 개혁에 대한 언급도 참기 어려웠다. “미래세대의 기회를 박탈하는 고용세습 등 (노조의) 기득권을 철폐”한다는 말은 명백히 과잉이다. 노조의 폐해가 어떻게 열악한 노동자의 근로환경보다 그리고 매일 위협받는 노동자의 목숨보다 우선 해결해야 할 일이란 말인가. “획일화 정치이념 교육에서 벗어나 창의 교육으로 방향 전환 중”이라는 자찬도 우습다. “과거 정부에서 시도조차 않았던 연금개혁”을 “착실히 준비 중”이라는 말에선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연금개혁은 추계만 수개월째 할 뿐 핵심 내용에서는 한 발짝도 나간 게 없다. “정치 복지가 아닌 약자 복지를 추구한다”는 말은 이미 허망해졌다. 간호법을 거부해놓고 어떻게 돌봄을 강화한다는 것인가.

윤 대통령은 전 정부를 탓하지만, 그 정책을 실력 있게 뒤집지도 못한다. 국익 중심의 경제외교를 한다면서 중국과 러시아에서 우리 기업의 이익을 훼손하고 있다. 미국에 엄청난 투자를 하면서도 국내 기업들이 불이익을 받는 것에 대해선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 이러니 최근 마약사범이 는 원인을 전 정부의 검찰개혁에서 찾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전 정권에서는 운동권 출신들이 온갖 요직을 차지하고, 이권에 개입했다고 비판해놓고 그 자리를 검사들로 채우고 있다. 결코 남을 탓할 상황이 아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주 국무회의에서 “우리 정부의 출발점은 과거 정부에 대한 평가에서 출발한다. 문제의식을 정확히 하지 않으면 변화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는 것과 전 정부의 실책을 끊임없이 비판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남 탓을 계속하는 것은 곧 자신의 고유 정책이 없다는 자백이다. 내가 잘못해도 앞선 정부가 워낙 망가뜨려놓았기 때문이니 이해해달라는 뜻으로도 비친다. 모름지기 대통령은 뚜벅뚜벅 자기 길을 걸어 훗날 역사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전 정부를 탓하는 것을 존립의 근거로 삼는 리더십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정치 지도자를 판단하는 데는 세 가지가 있다. 가치관과 비전, 그리고 경험이다. 가치는 무엇을 먼저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다. 윤 대통령은 노동자의 삶의 조건보다는 노조의 기득권 폐기를 앞세웠다. 비전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혜안이라고 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권력에 맞서는 결기는 보였지만, 미래를 내다보는 식견은 보이지 않는다. 경험은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에 얼마나 공감하느냐이다. 윤 대통령의 한·일 외교는 전혀 시민과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절망적인 것은 학습 효과와 의지도 별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박상훈의 <정치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진짜 정치 지도자는 시민의 삶을 어떻게 개선할지를 고민한다. 문제의 원인에 대한 진단은 필요하지만, 그것을 개탄하고 비판하는 데 매달려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 정치는 너도 옳고 나도 옳다고 생각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쪽저쪽의 의견이 다 일리가 있지만, 현 상황에서 더 좋은 정책이 무엇인지를 경쟁하는 것이다. 더 낫다고 생각한 대안을 내고 상대방을 설득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긍정의 리더십이어야 가능성의 정치를 통해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윤 대통령도 준비가 부족했을지언정 남 탓만 하려고 정치판에 뛰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젠 남 탓을 멈추어야 한다. 전 정부 탓을 할 시간에 야당 인사들을 만나 설득하고 부딪쳐야 한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 2년차 국정도 불길하다. 윤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 말미에 “국민들께서 나라의 변화를 체감하실 수 있도록 더욱 비상한 각오로 임하라”고 국무위원들을 독려했다. 게다가 국회의원 선거가 1년 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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