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악 위원장, 선관위를 지켜라

이중근 논설고문

선관위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다. 1995년 지방선거 때 출입기자로 등록한 이래 중앙선관위 자문위원으로 있는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선관위를 취재하면서 이런 일은 보지 못했다. 더구나 이번엔 선관위 내부 문제를 계기로 여권이 손을 보겠다며 벼르고 나선 터라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이중근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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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를 둘러싼 이번 논란을 보고 “결국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고 생각했다. 지난 수년간 선관위는 변화되는 환경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사전투표·해외투표 등 새로운 제도에 기민하게 적응하던 과거와 어딘지 달랐다. 보완을 요구하는 외부 경고에도 그다지 귀 기울이지 않는 듯했다. 도리어 선거관리에 대한 강박에 빠져 과도한 단속에 나서는 모습도 종종 보였다. 시민들에겐 무서운 권력기관으로 비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가 결국 국가정보원의 해킹 경고에 대한 대응 실패로 이어졌다. 선관위로서는 국정원의 개입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했는데 해킹 공동 점검에 미적거리다 불필요한 의심과 논란에 휘말렸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유연한 대처에 실패한 것이다.

선관위 고위 간부들 자녀들의 선관위 이직도 마찬가지다. 최근 지방직 공직자들 사이에서는 선관위가 비교적 눈치를 덜 보면서 일할 수 있고, 고위직 진급도 유리한 기관으로 인식됐다. 그러던 터에 최근 선관위에서는 육아휴직자 등이 급격히 늘어나 선거를 앞두고 그 빈자리를 채워야 했다. 이 와중에 투개표 관리를 지원할 교사와 지방직 공무원들이 선관위 업무 보조를 기피하는 현상까지 겹쳤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고위 간부 자녀 몇명이 선관위로 이직하는 경우가 벌어졌다는 게 선관위의 설명이다. 새로 공직자를 선발하는 게 아니라 이미 다른 기관에서 일하는 공직자를 이직시키는 일이라 하더라도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전체 인원이 고작 3000명인 기관에서 면접관들이 지원자 부모들과 알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투명하고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해야 옳았다. 경쟁률이 높지 않다거나 지원자를 물색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말로 해명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점을 감안해도 지금 선관위를 향한 여권의 비판은 상궤를 벗어났다. 특히 일부 보수언론의 바람잡이 기사는 최소한의 합리성과 형평성을 결여했다. 그 바탕에는 선관위가 민주당 편에 서 선거부정을 획책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깔려 있다. 하지만 여당이 일부 오해할 만한 선거법령 해석이 있기는 했어도 선관위가 민주당 편을 든 적이 없다. 그렇다면 여권이 노리는 것은 선관위의 무장해제다. 특히 내년 국회의원 선거를 위해 선관위를 장악하겠다는 뜻이 보인다. 여야가 합의한 국정조사도 여당은 거부하고, 선관위 전 업무를 대상으로 감사원 감사를 받으라고 압박했다. 보수 세력은 그동안 기회가 생길 때마다 선관위를 압박해왔다. 2003년에는 정치관계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선관위의 현장 단속권 축소를 시도했다. 이명박 정권은 우익 편향의 교수를 상임위원으로 박아놓고 선관위를 주무르려 했다. 과천 중앙선관위 청사 앞에는 지금도 지난 총선 때 투개표 부정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농성하는 극우파들이 있다.

선관위 쇄신은 필요하다. 하지만 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여서는 안 된다. 최근 대통령실은 김명수 대법원장의 대법관 후보 지명에 앞서 두 명을 콕 집어 반대 의사를 밝혔다. 명백한 삼권분립 정신 위반인데, 김 대법원장은 그에 굴복했다. 이런 여권이 선관위 문제를 그냥 지나칠 것 같지 않다. 여권은 노태악 중앙선관위원장에 대해 사임을 요구했다. 보수언론들이 그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 노 위원장 사퇴 요구는 김 대법원장에 대한 공격과 맞닿아 있다. 대법원의 구성을 바꿔나가는 한편 대법관이 위원장을 겸하는 중앙선관위까지 손에 넣겠다는 것이다. 선관위가 ‘아빠 찬스’ 의혹에 대해 국민권익위 조사를 받기로 한 데 이어 감사원 감사도 수용한다고 했다. 거기서 멈춰야 한다. 선관위가 사무처를 총괄할 사무총장을 외부에서 뽑기로 했다. 중립적인 법관 출신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한다. 선관위에는 이미 대통령이 임명한 중앙선관위 상임위원이 있다. 노 위원장은 사무총장과 차장 선임에서 여권의 압박에 굴복하면 안 된다. 노 위원장 자신에 대한 사퇴 요구는 더더욱 수용해선 안 된다. 여권도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선관위 팔을 비틀어 내년 선거에서 이기면 시민이 승복할까? 그 이후는 상상하기조차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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