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찬
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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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뉴스 내 목소리가 보이나요··· ‘말보다 강한 침묵’ 지난 20일 국제 어린이구호단체 유니세프에서 ‘백지 성명’을 냈습니다. 시리아 동구타 살상 사태에 대한 비난과 국제사회의 관심 호소를 담은 성명서였습니다. 백지라고 해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유니세프는 성명서 타이틀 바로 밑에 백지 성명을 내는 이유를 써놓았습니다. “그 어떤 말로도 숨진 어린이와 그 부모, 그들이 사랑했던 이들을 제대로 다룰 수 없습니다.” 유니세프는 묵언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강하게 드러냈습니다. 백 마디 말보다 무언의 침묵이 전하는 메시지가 더 강렬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하얀 종이를 매개체로 하는 신문은 자신의 목소리를 강하게 표출하려 할 때 백지 전법을 구사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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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비밀은 없다 일주일이 넘었다. 낮밤 없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주변엔 추모와 울분이 식지 않고 있다. 한동안 그 맞은편에선 경찰 병력이 장벽을 쳤었다. 고 백남기씨의 부검을 집행하려는 경찰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장벽을 세우고 ‘물대포 사망의 진실’이 새어나가는 것을 차단하려 한다. 경찰은 부검으로 사인을 밝히는 게 정당한 법집행이라고 말한다. 유족의 반대는 아랑곳없다. 백씨 죽음의 진실을 독점하겠다는 의지로 비친다는 비판이 틀려 보이지 않는다. 백씨가 숨진 후에도 경찰은 사과를 거부했다. 되레 유족과 맞서고 있다. 국가 공권력이 한 시민의 죽음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 생생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부검영장 집행 유효기간은 이달 25일까지다. 갑작스러운 충돌 가능성은 줄었지만 경찰과 유족은 앞으로 긴 시간 동안 평행선을 달릴 게 뻔하다. 어느 추모자가 빈소 주변에 붙인 포스트잇에는 “국가란 무엇인지 묻고 싶다”고 적혀 있기도 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백씨는 공권력의 민낯을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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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세상에 ‘공짜’는 없다 서울시내 한 음식점에서 ‘영란세트’라는 메뉴를 내놨다는 뉴스를 며칠 전 TV에서 보았다. 생선회와 탕으로 구성된 7만원짜리 3인분 세트였다. 뉴스가 강조한 것은 가격이었다. 3명이 먹는데 9만원이 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9만원 이하 메뉴’는 음식점의 생존 노력의 하나라는 게 뉴스의 설명이었다. 이 메뉴에는 1인당 밥값이 3만원을 넘으면 안된다는 어떤 불문율이 작동하고 있다.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공무원, 사립교원, 언론인 등이 직무와 관련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1인당 3만원이 넘는 식사 대접을 받으면 과태료를 물게 된다. 앞으로 ‘밥값 3만원’은 불문율로 처벌의 잣대가 되는 것이다. 밥값에는 술과 음료수도 포함된다. 이 식당의 사례는 김영란법이 몰고올 변화 가운데 하나이다. 법 시행까진 두 달 가까이 남았지만 음식점은 이미 김영란법의 파장을 체감하고 있는 셈이다. 그 속엔 변화의 강도가 만만찮으리라는 예감이 깔려있다. 식당의 메뉴판을 바꿔놓는 것처럼 김영란법은 밥값의 개념도 바꿔놓을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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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동생아, 미안해”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에서 자란 남매의 밥상에는 생선 반찬이 심심찮게 올라왔다. 살림이 풍족하지 못한 탓에 생선의 마릿수는 넉넉지 못했다. 밥상에 올라온 갈치, 고등어, 병어 등 생선은 매번 오빠 앞에 놓였다. 어머니는 가시를 바른 하얀 생선 살을 오빠의 수저에 올려주었다. 동생의 수저로 향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해마다 여름철이 시작되면 어머니는 보약을 지으러 다녔다. 이름난 한의원을 찾아다니며 하얀 종이에 싸인 약 한아름을 들고 오곤 했다. 한 달치 보약은 늘 오빠를 위한 것이었다. 더운 날씨에 공부 잘하고 아프지 말라는 게 이유였다. 어머니는 정성스레 달인 보약을 하얀 사기 사발에 담아 오빠 앞으로 내밀었다. 오빠는 그 쓰디쓴 액체가 동생의 입으로 향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오빠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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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70인과의 동행 (7) 시인의 소박한 집, 품 넓은 절집에서 우린 ‘가노을빛’으로 만났네 ■신동엽 시인을 찾아가는 길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지난 23일 충남 부여 부여읍에 위치한 신동엽 시인 생가 바로 옆 신동엽문학관 앞마당. 마이크를 잡은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 소장(83)은 A4 용지 한 장에 프린트된 글들을 카랑카랑하게 읊기 시작했다. ‘껍데기는 가라’로 잘 알려진 신동엽 시인의 시 ‘진달래 산천’이었다. 백 소장의 낭송은 점차 외침으로 바뀌었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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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위안부 기억투쟁 이봉운 할머니. 그는 꽃다운 나이에 중국 헤이룽장성 스먼즈(石門子)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갔다. 1945년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군은 그를 중국땅에 버려두고 철수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그는 현지 중국인과 결혼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던 그는 남편의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남편과 사별한 후 오갈 데 없어진 그는 남편의 친척집에 얹혀 살았다. <헌병이었던 아버지가 남긴 것(憲兵だった父の遺したもの)>이라는 책에 실린 이봉운 할머니의 사진을 잊을 수 없다. 한 촌로와 함께 온돌 위에 앉아 있는 할머니는 증언이라도 하는 듯 카메라를 향해 말을 건네고 있다. 수척한 얼굴과 추레한 옷차림은 궁핍함 속에서 신산한 삶을 이어오고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책을 쓴 구라하시 아야코(倉橋綾子)는 아버지의 충격적 유언을 좇아 중국 벽촌 스먼즈까지 가서 이봉운 할머니를 만났다. 구라하시의 아버지는 제국 일본군 헌병으로 만주 등지에서 복무했는데 당시 복무지의 중국인과 조선인을 수소문해서 자신의 사죄를 전달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구라하시가 2000년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다 만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위안부 피해자 이봉운 할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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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 불평등·불의에 무관심과 냉소 연대의 가치 잠식당하는 유럽 돌이켜보면 튀니지에서 시작한 민주화 바람이 리비아, 이집트로 이어졌던 ‘아랍의 봄’ 앞에서 유럽은 침묵했다. 다른 나라 정국에 감 놔라 배 놔라 하긴 어렵지만, 유럽연합 정부들은 의아할 정도로 무신경했다. 정부 반대편에 선 제도권 정당도 먼발치에서 바라볼 뿐 오십보백보였다. 결국 아랍의 봄은 오래 못가 시들어버렸다. 아랍의 봄처럼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확산을 응원해온 유럽 정치가 달라진 것일까. 정치평론가들은 이런 현상을 유럽 극우세력의 약진과 연관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들은 이를 ‘아디아포론’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리스어 아디아포론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는 뜻이다. 타인에게 일어나는 일을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이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구경만 하는 인간의 속성이 아디아포론인데 ‘도덕적 불감증’의 하나이다. 저자들은 현대 유럽의 정치적 속성을 아디아포론에서 찾는다. 그래서 이웃 국가에서 경천동지할 변혁이 발생해도 좀처럼 정치적 공감을 표시하지 않는다. 유럽은 지금 정치적 감수성 상실과 도덕적 불감증을 앓고 있다는 게 저자들의 진단이다. 이는 정당뿐만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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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 땅거미 지는 20세기의 부르주아 예술 암울하다 불세출의 역사학자 홉스봄은 예술에도 해박했다. 고전음악은 물론 재즈와 팝뮤직에 관심이 많았고, 회화와 건축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1960년대부터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까지 썼던 짤막한 글들을 묶은 이 책은 홉스봄의 그런 면모가 잘 드러난다. 홉스봄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20세기 예술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리고 21세기에 예술은 어떤 모습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부르주아가 향유하던 예술은 근대 이후 길을 잃은 채 안착하지 못하고 있다. 홉스봄은 주된 원인으로 자본의 세계화와 기술 혁명을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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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 평범한 독일인들의 무차별 살상… 왜 그들은 집단광기에 빠졌을까 “폭탄 열여섯 발 중 여덟 발이 도시 안으로 떨어졌어요. 집들 가운데로요. 셋째 날에는 아무러면 어떠냐는 심정이 되었고, 넷째 날에는 즐거워졌어요. 아침의 식전 오락 같은 거였지요. 들판에서 달아나는 군인들을 기관총으로 몰아가고 총알 몇 발로 뻗게 만드는 일이 말이에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 조종사가 자신의 출격 경험담을 동료에게 토로한 내용이다. 그는 무차별적인 살인 행위를 오락에 비유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전투를 1인용 슈팅 게임처럼 표현한다. 무용담은 계속 이어지는데 죄책감이나 적군에 대한 동정은 찾아볼 수 없다. 민간인 사살 장면을 묘사할 때도 즐거웠다거나 재미있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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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 낭인 기쿠치, ‘칼’로 명성황후 죽이고 ‘펜’으로 식민사관 심어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10월8일 새벽, 기쿠치 겐조(1870~1953)는 흥선대원군이 탄 가마를 호위하며 일본 낭인 수십명과 함께 경복궁으로 들이닥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쿠치 일행은 명성황후를 찾아내 살해했다.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기쿠치는 일본 구마모토 출신 낭인이다. 낭인이란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사쓰마번·조슈번 출신이 아닌, 그래서 관료가 되지 못한 무사를 일컫는다. 일본 무사계층은 조선시대 사대부에 준한다. 이들은 막부체제를 떠받친 식자층이었다. 1만엔짜리 지폐 속 인물 후쿠자와 유키치도 무사 출신이었는데, 기쿠치 또한 상급 학교를 나온 지식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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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 옛글을 통해 일그러진 한국을 본다 과거를 거울로 삼아 오늘을 철저히 따져보고 궁리하기. 조선시대 문헌을 공부하는 지은이가 밝힌 이 책의 의미다. 60개의 짧은 글들은 하나하나가 표창이다. 60개의 표창이 겨눈 곳은 일그러진 한국 사회다. 잡문이라지만 날이 섰다. 21세기 한국은 조선시대보다 나아졌나. 불평등, 학벌주의, 생명경시, 부정부패, 공동체적 삶의 와해. 지은이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에 분추경리(奔趨競利)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뭔가 이익을 노리고 분주히 쏘다니는 꼴을 뜻한다. 조선 법전은 분추경리를 금하고 이를 규정해두었다. 그 내용인즉, 이조·병조·사헌부·사간원 소속으로 인사권을 쥔 고위직의 자택에 동성 8촌, 결혼한 집안 사람, 이웃 사람 등이 아니면 출입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를 어길 경우 ‘곤장 100대 후 귀양’에 처했다. 초기 조선이 매관매직에 얼마나 엄혹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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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 ‘오래된 현재’ 베트남전쟁의 후유증은 치유됐을까 ▲ 베트남전쟁의 한국 사회사 윤충로 지음 |푸른역사 | 402쪽 | 2만5000원 가난이 싫어 베트남전쟁에 자원한 어떤 군인은 “베트남보다 한국이 지옥”이라고 믿으며 전쟁을 충실히 수행했다. 모범 파월 군인이었던 그는 귀국 후에도 베트남 향수를 떨치지 못했다. 그래서 참전 군인단체를 결성하고, 군복을 일상복처럼 입고 다니며 옛 전우들과 어울리며 자주 술을 마셨다. 자연스레 가족은 뒷전으로 밀려났고 결국 이혼했다. 1992년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베트남으로 달려갔다. “여기 와 가지고 그 당시에 마음이 얼마나 편한지. 꿈, 꿈, 꿈속을 헤매는 그런 기분으로 만날 살았어요.” 그는 베트남에서 재혼했고, 전쟁터를 찾아다니는 것을 낙으로 삼고 전쟁 관련 물품을 모으는 취미를 즐기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