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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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98년생 김현진’ 2016년 ‘문단 내 성폭력’을 고발하고 싸워왔던 김현진씨가 세상을 등졌다. 김씨의 변호를 맡았던 이은의 변호사는 지난 17일 페이스북에 “짧았지만 빛나고 뜨거웠던 98년생 김현진님의 작별을 전한다”며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알렸다.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른다. 다만, 과거를 잊고 살려 했으나 너무 힘에 부쳤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2023년 11월 가해자인 시인 박진성씨가 실형을 선고받은 뒤 경향신문과 인터뷰했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
여적 이주노동자의 지워진 이름 한국의 직장에서 여성들이 이름 대신 ‘미스 김’ ‘미스 리’ 등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영미권에서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게 붙이는 ‘미스(Miss)’가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을 낮춰 부르는 말이었다. 본뜻에 상관없이 결혼을 해도 한번 ‘미스 김’이면 영원히 ‘미스 김’으로 불렸다. ‘미스’ 호칭엔 여성 비하와 차별적인 시선이 은연중에 담겨 있다. 남성을 도와 허드렛일이나 하는 무명의 존재로 여겼기에 통용되는 호칭이었던 것이다. 입사 동기인 남성 동료들조차 “미스 김, 커피 한잔” 하기 일쑤였다. 그냥 이름을 불러달라고 해도, 숙녀 이름을 어떻게 마구 부르냐며 굳이 ‘미스’라는 호칭으로 당사자를 거슬리게 하던 것이 엊그제다. -
여적 트럼프의 신성모독 “너는 선택된 자였어(You were the Chosen One)!”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에서 어둠의 세력에 물들어 ‘다스베이더’로 변신한 아나킨에게 스승인 오비완 케노비가 외친 대사다. <스타워즈> 시리즈 팬들에겐 가장 눈물 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 유명한 대사를 빌린 적이 있다. 2019년 8월21일 미·중 무역전쟁의 당위성을 강변하며 “나는 선택된 자(chosen one)”라고 한 것이다. 이 말은 기대가 실망으로 변했을 때 내뱉는 서글픈 밈으로 통한 지 오래이지만 지독한 나르시시즘에 빠진 그에게는 의미가 다르다. 그는 정말로 자신을 ‘선택받은 자’로 여기는 듯하다. 2024년 7월 총격 암살 위기를 넘긴 것조차 ‘자신을 지키려 신이 개입한 증거’라는 식이다. -
여적 올레길에서 행복하라 대부분의 도보 여행기는 깨달음으로 충만하다. 여행에선 통제할 수 없는 일이 자주 일어나게 마련이니 실패를 통해 겸손해지는 경우가 많다.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은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종주’ 실패담일 것 같다. 이 책은 영국에서 기자 생활을 하던 브라이슨이 미국으로 돌아와 애팔래치아 트레일(AT) 종주에 도전하는 과정을 그렸다. 1996년 길을 떠난 브라이슨은 3360㎞에 달하는 코스를 완주하진 못했다. 하지만 완주가 뭐 그리 중요한가. “우린 시도했다”는 그의 말처럼 도전만으로도 의미 있다. -
여적 예술활동증명 ‘해리 포터’ 시리즈를 쓴 영국의 작가 조앤 롤링이 동생 집에 얹혀살며 정부 보조금으로 근근이 살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훗날 그는 “정부 지원이 없었다면 ‘해리 포터’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온갖 어려움을 견디고 큰 성공을 거둔 롤링의 해피엔딩은 기적에 가깝다. 예술가들의 삶은 대부분 고단하다. 당장 먹고살기도 힘들고, 성공한 소수를 빼곤 안정적 미래 설계가 어렵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4년 예술인 실태조사’를 보면 창작활동 평균 연소득은 1055만원이었다. 입에 ‘풀칠’하느라 예술인 2명 중 1명은 부업을 하고 있었다. -
논설위원의 단도직입 “BTS, 열린 광장에서 닫힌 공연…행정편의주의가 생동감 죽였다” 영화학자이자 미디어문화 연구자다. 현재 전북대학교 K-엔터테인먼트학과에서 외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K콘텐츠를 가르치고 있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서구 음악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시기인 2017년부터 2019년까지 글로벌 팬덤 ‘아미’의 행보와 문화정치적 의미를 기술한 <BTS와 아미컬처>를 펴냈다. 이 책은 일본·프랑스를 비롯해 총 7개국에 번역·출간됐다. 기술 변화에 따른 동시대 대중문화 콘텐츠와 수용자 속성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진행해오고 있다. 최근 연구 주제는 디지털 대중으로서의 팬덤의 정치성과 대중문화에 재현된 포스트휴먼의 정체성이다. -
여적 ‘마약 두목’ 박왕열 그는 스스로를 ‘전세계’라 칭한다. ‘전 세계 모든 마약을 다 구해줄 수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는 필리핀에서 텔레그램을 통해 국내에 엄청난 양의 마약을 퍼뜨리는 조직의 총책이었다. 필리핀 유흥도시 앙헬레스에서 잔조(ZANJO)라고 불리던 남성은 사설 카지노를 운영하며 불법 도박 사업을 했다. 그리고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카지노>의 모티브가 된 ‘사탕수수밭 살인사건’의 범인 박왕열. 놀랍게도 이 세 명은 동일 인물이다. -
여적 영 케어러 2021년 5월 대구에서 22세 청년 강도영씨(가명)가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를 방치해 숨지게 한 사건이 있었다. 처음엔 패륜 범죄인 줄로만 알았는데 진실탐사그룹 ‘셜록’의 보도로 이 사건의 이면이 드러났다. 집에서 아버지를 돌보던 강씨는 난방·인터넷은 고사하고 쌀 살 돈이 없을 정도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살길이 막막해지자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고, 강씨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버지를 포기한 청년의 비극은 ‘영 케어러’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고, 우리 사회에 큰 숙제를 던졌다. -
여적 왕과 사는 남자 숙부에게 왕위를 뺏기고 쫓겨난 단종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사극의 단골 소재였다. 강원 영월 유배지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어린 왕, 그 속에서 단종은 그저 애처로운 소년일 뿐 군주로 묘사되진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딱 이 정도다. 실제로 당시 기록이 충분치 않다. 단종은 1457년 6월21일 유배를 떠나 그해 10월21일 사망했다. 이 4개월간 단종이 어떻게 살고 세상을 떠났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우리가 몰랐던 그 부분을 상상력으로 채워낸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기록된 ‘노산군(단종)이 돌아가시자 엄흥도가 슬퍼하며 곡을 하고 시신을 수습한 뒤 장례를 치렀다’는 문장이 단초다. 영화는 이 사실을 토대로 단종 이홍위(박지훈)가 유배지에서 촌장 엄흥도(유해진)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며 보내는 이야기를 상상해 낸 것이다. 단종의 삶이 고역이기만 했는지, 영화에서처럼 행복한 순간도 있었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럼에도 영화는 단종이 무력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란 당연한 사실을 일깨운다. “패자의 흔적은 사멸하지 않고 후대의 사가에 의해 되살아나기도”(<모반의 역사>) 한다는데, 이 영화가 그 후대의 사가 역할을 한 셈이다. -
여적 비만 예방 수칙 1996년 세계보건기구(WHO)는 비만을 ‘치료가 필요한 질병’으로 규정했다. 비만이 그저 몸매 문제가 아니라 고혈압·당뇨병 등 만성질환의 근원이 된다는 공식 경고였다. 이후 세계 각국이 ‘비만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건만, 어떻게 된 일인지 비만 인구는 전 세계적으로 더 늘어 10억명이 넘는다. 문제는 비만을 질병이 아닌 개인의 실패로 여기는 일이 많다는 사실이다. 넷플릭스 영화 <맵고 뜨겁게>는 복싱 선수로 거듭나려는 비만 여성 러잉의 힘겨운 살 빼기를 다뤘다. 그는 혹독한 훈련 끝에 50㎏ 감량에 성공하고 자존감을 되찾는다. 그를 움직인 건 복싱장의 전단지 문구다. “이겨본 적 있습니까? 단 한번이라도!” 이 영화가 대중의 마음을 움직인 것도 살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들의 동병상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은희경 작가의 소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가족을 버린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살을 빼기로 결심하는 뚱뚱한 남자 이야기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연작시에서 빌려온 제목처럼 아름다움에 ‘멸시’당하고 ‘멸시’하는 우리들을 보는 듯하다. -
여적 생활형 교복 전국 어디를 가나 똑같은 교복이 도입된 건 1969년 중학교 평준화가 시작되면서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클래식>에 등장하는 동·하복을 떠올리면 된다. 1983년 교복·두발 자유화 조치로 교복이 잠깐 없던 시절도 있었다. 그대로 사라질 것만 같던 교복은 빈부의 위화감 조성 등을 이유로 1985년부터 부활했다. -
여적 경자유전 “소작제도라는 수천년 내려온 제도를 고치자는 것이에요. 이것이 개혁이에요. 개혁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에요.” 1949년 3월, 국회에서 조봉암 의원은 농지개혁안을 늦추려는 의원들을 설득한다. 결국 1950년 3월 농지개혁법이 공포됐다.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은 지주층의 방해를 막아낸 조봉암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토지사유제 원칙을 유지하기 위해 유상몰수·유상분배 방식을 택했어도, 농사를 짓는 사람만 농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했다. 훗날 헌법에서 못 박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