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가장 나쁜 ‘사과’

이명희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18일 서울 서초구 농협 하나로마트 양재점에서 과일 물가 현장 점검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18일 서울 서초구 농협 하나로마트 양재점에서 과일 물가 현장 점검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총선 패배 후 ‘반성문’을 썼는데도 민심은 싸늘하다. 국민은 왜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 걸까.

미국 언어학자 에드윈 바티스텔라가 쓴 <공개 사과의 기술>을 보면, 윤 대통령 사과는 잘못을 인정하는 사과의 첫 단계부터 잘못됐다. ‘그러나·하지만’ 같은 ‘잘못을 축소하려는’ 조건을 달았다. 윤 대통령이 16일 직접 내놓은 첫 총선 관련 메시지에는 ‘국민이 이해하지 못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문장이 되풀이됐다.

“취임 후 2년 동안 국민만 바라보며 국익을 위한 길을 걸어왔지만,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물가 관리에 총력을 다했다. 그러나 서민들의 형편을 개선하는 데에 힘이 닿지 못했다.”

사과에도 정석이 있다. ①무엇이 미안한지 내용이 구체적이어야 하고 ②늦지 않게 제때 ③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④앞으로의 다짐과 약속이 있어야 제대로 된 사과가 완성된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사과에는 이 4가지가 모두 미흡하거나 아예 없다. ①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없이 ‘최선을 다했지만’이라 했고 ②총선 패배 후 엿새 만에 내놓은 메시지는 타이밍도 늦었고, 형식과 내용 모두 실망스러웠으며 ③그저 변명으로 일관하니 진심이 느껴지지 않아 반감을 샀다. ④의대 증원 등 국정방향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국민들께 죄송하다”는 말도, 나중에 참모의 별도 설명에서 나왔다. 실패한 사과의 공식을 모두 갖춘 ‘가장 나쁜 사과’의 사례로 꼽을 수 있겠다.

검사 출신의 윤 대통령은 사과에 인색하고 서툴다. 대선 후보 시절에도 ‘전두환 옹호’ 발언을 했다가 여론이 나빠지자 인스타그램에 반려견에게 사과를 주는 사진을 올려 ‘개사과’ 논란을 부른 적 있다. 사과는 곧 굴복으로, 자신의 체면을 잃는다고 믿는 것일까.

바티스텔라는 “사과도 기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술이 전부는 아니다. 국민은 사과가 진심인지 가식인지 금방 알아챈다. 지금 국민이 듣고 싶은 말은 윤 대통령이 미흡함을 인정하고, 민심 앞에 더 겸허하겠다는 각오를 밝히는 것이다. 언어는 “미안해”가 아닌 “내가 잘못했다”여야 한다. 위기를 모면하고자 토를 단 사과는 십중팔구 사태를 악화시키는 불쏘시개 구실을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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