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서울의 봄’ 정선엽 병장

이명희 논설위원
지난해 12월12일 광주광역시 북구 동신고에서 열린 정선엽 병장 44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고인의 동생 규상씨가 정 병장 추모비를 어루만지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2월12일 광주광역시 북구 동신고에서 열린 정선엽 병장 44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고인의 동생 규상씨가 정 병장 추모비를 어루만지고 있다. 연합뉴스

“인간이 명령 내리는 걸 좋아하는 것 같제? 안 있나? 인간은 강력한 누군가가 자기를 리드해주길 바란다니까.”

1979년 12월12일 신군부의 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전두환 역)은 이렇게 말한다. 그 누군가는 전두광 자신이다. 그의 관점에서 굳이 말하자면, 국민의 열망에 부응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인데, 진짜 이유는 바로 알게 된다. 전두광은 반란군 지휘부가 집결한 경복궁 30경비단 화장실에서 노태건(노태우 역)에게 말한다. “저 안에 있는 인간들, 떡고물이라도 떨어질까 봐 그거 묵을라고 있는 기거든. 그 떡고물 주딩이에 이빠이 처넣어줄 끼야, 내가.”

어쨌거나 전두환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날 밤, 정선엽 병장은 육군본부 지하벙커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중대장님 지시 없인 절대 총을 넘겨줄 수 없다”며 버티다 반란군의 총격에 숨졌다. 영화 속 조민범 병장이 정 병장을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총기사고로 은폐되다가 43년 만인 2022년에야 ‘순직’에서 ‘전사’로 바로잡혔다. 유가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고, 지난 5일 정 병장의 죽음을 왜곡했던 국가 책임이 인정됐다. 그간 유가족들이 겪었을 고초는 가늠조차 안 된다.

정 병장의 죽음은 <서울의 봄>을 향한 시민들의 관심 덕분에 주목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12·12 당시 반란군 총격에 숨진 ‘참군인’ 김오랑 중령 추모비는 국방부 반대로 아직도 못 세우고 있다. 역사는 아직도 미완의 진행형이다.

돌아보면, 역사를 되돌린 수많은 정선엽·김오랑이 있었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 주인공 동호의 실제 모델 문재학씨는 1980년 5월27일 새벽 전남도청에서 계엄군과 싸우다 숨졌다. 당시 16세였다. 2001년 9·11 테러 당시 UA93기에서 토드 비머가 납치범과 몸싸움에 돌입하기 전에 휴대전화로 말한 것으로 알려진 “시작하자(Let’s roll)”는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과연 ‘나’였다면 어땠을까 싶지만, 평범한 우리가 낼 수 있는 용기도 있다. 국가의 외면에 분노할 줄 아는, 의로운 이들을 잊지 않는 용기다. 우리가 후회하는 건 어떤 일을 한 것 때문이 아니라 하지 않은 것 때문이라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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