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료 제도를 놓고 공론조사를 하자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한국방송공사(KBS)는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위기는 정부가 추진하는 수신료 분리 징수가 일사천리로 이루어져 당장 방송사 수입이 격감하리란 전망에 한정되지 않는다. 공영방송 제도가 동네북처럼 이리저리 두들겨 맞아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그게 ‘공중의 이익’을 침해하는 사태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진정한 위기가 있다. 이 땅에서 공영방송은 사소해지는 수준을 넘어 어찌 되어도 상관없는 존재로 전락 중이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사태가 이렇게 되는 데 공영방송 스스로 기여했다. 무엇보다 지상파 방송을 디지털 플랫폼으로 만들어내지 못한 죄가 있다. 이미 매달 수신료를 지불하는 시민은 지상파 방송 채널을 수신하기 위해 유료방송 제공자에게 따로 매달 가입비를 지불해야 하고, 지상파 사이에 낀 홈쇼핑도 봐야 한다. 사정이 이래서는 수신료의 가치를 논하기조차 민망하다.

둘째, 과거 뉴스나 시사물에 공정성 시비가 불거졌을 때 공영방송 경영진 중 책임지고 물러난 자가 없다. 공영방송 언론은 뉴스에 공정성 시비가 벌어지고 있다는 인식만으로도 불명예를 느껴야 마땅하다. 또한 그 시비에 실체적 이유가 있다고 판단하면, 내부에서 깔끔하게 책임을 지고 대응함으로써 어떤 정권의 무슨 세력이라도 편집권에 간섭할 수 없도록 방어해야 한다. 공영방송의 책무란 최고경영자의 인사권 행사로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결정적으로 상업적 수입이 아닌 수신료가 우리나라 창의산업의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공영방송 스스로 확신이 없다. 고품질 역사극이나 고비용 기획물을 제작하는 데 시민이 지불한 준조세가 얼마나 기여했는지, 또한 그런 제작이 요소와 유통시장은 물론 유관 산업에 얼마나 승수효과를 창출했는지 남들은 몰라도 공영방송은 알고 있어야 한다. 수신료의 가치를 투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사안들이 모두 이미 지난 일일 뿐이며 따라서 재론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라 생각한다면, 그건 일종의 ‘타락의 증거’다. 이 나라에서 이미 많은 것들이 꼬일 대로 꼬였다지만, 방송 내용의 공적 가치, 제도적 책임, 그리고 투명한 경영 등이 아닌 다른 잣대를 들이대면서 공영방송 개혁 운운하면 곤란하다.

한국방송공사는 이럴수록 시민을 설득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 나는 그래서 수신료 제도 개선방안을 놓고 공론조사를 벌일 것을 제안한다. 공론조사는 갈등 사안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갖고 있는 당사자가 시민을 설득해야 하는 일종의 ‘경연적 공론장’을 구현한다. 당사자인 한국방송공사 경영진은 물론 여당의 정책 책임자를 포함해 공론조사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시민의 대표들이 수신료 제도의 개혁방향을 결정하도록 맡기면 된다.

한국방송공사는 지금 여론에 호소하는 것 이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이는 수신료 분리 징수를 추진 중인 여권의 정책 전문가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의심스러운 표집방법과 불분명한 응답을 단순하게 집적한 일반 여론조사가 아니라 갈등 사안의 양측에 속한 전문가들의 설명에 따라 정돈된 의견을 갖춘 시민의 태도변화를 확인하는 공론조사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의제를 설정하고, 대안들을 정련해 시민의 대표자가 혼선 없이 대안을 선택해서 합의를 이룰 수 있는, 방법론적으로 타당한 공론조사를 설계하는 일이 중요하다.

공론조사를 했는데도 시민의 대표들이 수신료를 압박하는 방향으로 의견이 쏠리면 어찌해야 하나. 한국방송공사는 이런 경우에도 다른 누구를 탓할 수 없다. 시민을 설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도 설득하지 못한다면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수신료 개혁을 위한 대안을 잘못 제시했거나, 대안을 선택할 이유를 요령 있게 제시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스스로 방어하지도 못할 이념을 실현하겠다고 나선 자신을 돌봐야 한다. 실로 이는 민주적 결의성이 모두에게 가르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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