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싸우지 좀 말자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여름휴가 어디 다녀오셨냐고 묻는 분들께 이렇게 답한다. “아세모글루의 신작 <권력과 진보>요. 어떤 번역에는 애쓰모글루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쨌든 <권력과 진보>라니 무슨 진보정당 집권플랜처럼 들리지만, 실은 기술의 발전 경로를 제도적으로 바로잡자고 주장하는 책이랍니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그렇다. 휴가는 짧고, 각자 읽다만 책들도 있겠지만, 지금 <권력과 진보>를 함께 읽고 싶다. 휴가철을 맞아 관행적으로 대통령실이 내놓았던 독서목록조차 기대할 수 없게 돼버린 마당에, 우리라도 읽고 또 읽어서 이 어지러운 세상에 혼란을 덜어보자는 심정으로 권유한다. 특히 챗GPT가 어쨌고, 인공지능(AI)이 저쨌다고 외치는 선무당 같은 책들은 버리고, 테크주냐 소재주냐 떠들어대는 약장수 책들도 치우고 일단 이 책을 함께 읽었으면 한다.

전작 <좁은 회랑>에서 애쓰모글루는 로빈슨과 함께 나라가 발전하려면 국가와 사회 간 균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한 줄로 요약하니까 별 내용도 없어 보이지만, 이 책은 한 공동체가 나라가 돼 발전하거나 망하는 길이 무언지 밝히는 획기적 전망을 제공한다. 저자들은 우리나라처럼 국가주도적으로 발전한 나라일수록 국가가 폭력적 리바이어던으로 변하지 않도록 족쇄를 채워야 하는데, 그래서 시민사회가 분투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신작 <권력과 진보>에서 아세모글루는 존슨과 함께 기술의 진보를 내다보는 엘리트의 전망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파한다. 책을 열면 수에즈 운하를 개발한 영웅 레셉스의 사례가 재밌다. 그는 수에즈에서 성공한 전망을 그대로 파나마에 적용해 참담하게 실패했다. 저자들은 주장한다. 설득력을 갖춘 전망이 곧 권력이라고. 기술발전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전망은 기술이 새로운 업무와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가, 그리고 기술발전으로 인한 생산성 증가의 이득을 노동자도 함께 나누어 갖는가이다. 이 책은 기술전망을 독점하는 과두제가 기술의 발전경로를 조작해 이익을 전횡하지 않도록 그들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권력과 진보>를 읽으면서 나는 오래전 진보주의 진영 내에서 벌어진 다툼을 떠올렸다. 스티븐 핑커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이제 인간은 이성과 공감능력 덕분에 문명화와 권리혁명 등을 이룩했으며, 과거 어느 때보다 평화롭게 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보수주의자, 현실주의자 또는 유신론자의 동기화된 비판이 뒤를 이었는데, 실은 일부 진보 인사들의 비판도 대단했다. 현대 사회에 엄연한 불평등·착취·폭력 등을 생각하면 핑커의 주장은 그저 사료를 잘못 분석한 결과이거나 아니면 무모한 낙관론일 뿐이라는 것이다.

비판 중에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는 제목부터 신랄하다. 핑커를 두고 선사 및 역사 자료에 대한 무지, 통계의 오용, 낡은 위그주의 사관, 기술관료적 신자유주의, 환경폭력에 대한 무감각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비판했다. 간혹 우리도 모르는 이야기를 어찌 그리 자신만만하게 주장하느냐는 질시를 표현하거나, 우리 책은 왜 안 팔리냐는 자성의 목소리가 담기기도 한다. 이런 비판과 오해, ‘아무 말 대잔치’에 대해 핑커가 <지금 다시 계몽>에서 보여준 반론도 통렬하다. 다만 안타까운 일은 진보를 주장한다는 자들이 왜 이리 서로 박 터지게 싸우냐는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전망에 대해선 아세모글루의 견해를 따라 보자. 기술혁신이든 권리혁명이든 어떤 진보가 ‘그저 그런’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선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창출하고, 이익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전망이 타당한지조차도 역사적으로 탐구해서 검토해야겠지만, 이는 그저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게 좋다거나 아니면 언제나 슬프고 괴로운 자들이 있으니 조심하자는 막연한 주장들보단 훨씬 깔끔하다. 싸우지 않고 토론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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