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이 뭔지 알아요?

손희정 문화평론가

며칠 전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와 성평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성교육·성평등 도서를 공공도서관에서 빼라는 일부 단체의 금서 지정 운동에 반대하는 행동독서회 자리에서였다. 어린이는 금서 목록에 올라온 <함께 생각하자, 성평등>을 들고 다가와 나에게 물었다. “성평등이 뭐예요?”

손희정 문화평론가

손희정 문화평론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황당하게도 그 유익한(!) 책은 내가 쓰고 순미 작가가 그림을 그린 책이었다. 땀을 흘리며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려고 노력하다 결국 실패했다. 나는 “여자애가” “남자애가”라는 말 뒤에 따라오는 편견이 어떻게 차별로 이어지는가에 대해 말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그런 설명이 어린이에게 고정관념을 만들어 줄까봐 두려웠다. 궁여지책으로 스스로를 여자 혹은 남자로 규정하지 않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아이돌 ‘앰버’ 이야기를 해보려 했는데, 어린이는 앰버를 몰랐고 나는 어린이의 최애 아이돌인 ‘뉴진스’를 잘 몰랐다. 결국 대화 결렬.

무엇보다 성평등에 대해서 말하려면 성에 대해 설명해야 할 텐데, 초등학교 1학년에게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내가 뱉은 말이 혼란을 주거나 상처가 될까봐 단어를 거르느라 정신이 혼미해졌다. 하지만 어린이는 이미 (이 사회에서) “불룩한 성기를 가진 사람은 남자고, ‘예쁘다’보다는 ‘멋있다’고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대화를 곱씹으면서 깨달은 건 내가 ‘성(性)’만 붙으면 내용도 확인하지 않은 채 유해서적 딱지를 붙이는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나 역시 성을 “위험한 것, 까닥하면 어린이를 망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런 문화 속에서 자랐으므로, 그걸 넘어서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와 고민이 필요했다. 그렇게 책을 쓰고 자문도 받아 책을 냈지만, 그 내용을 바탕으로 직접 어린이와 의견을 나눠 본 적은 없었다.

성교육 전문가 심에스더는 부모를 위한 성교육 책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에서 “아이에게 섹스라는 말, 해도 될까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아이들이 언젠가 알게 될 이야기, 알아야 할 이야기라면 피하기보다 우리가 아는 대로 최선을 다해 말해주는 것이 좋다. 그래야 왜곡된 정보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완벽한 정보를 주지 않아도 어른들이 솔직하게 말한다면 아이들은 의외로 편견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문제는 어른도 성에 대해 잘 모른다는 점이다. 생식기 구조나 이름을 잘 모르고, 몸에 일어나는 일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음담패설은 해도 피임법은 제대로 모르는 나라, 그게 대한민국이다. 그러다보니 올바른 성교육은 고사하고, 내 몸의 건강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성인 대상 포괄적 성교육 역시 필요한 이유다.

어린이가 나와의 대화에 흥미를 잃어갈 즈음에야 나는 문득 물었다. “평등이 뭔지 알아요?” 어린이는 답했다. “아니요.” 나는 이 대화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깨달았다. 성평등은 결국 평등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나조차 잊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보수 학부모 단체가 막고 있는 건 평등에 대한 교육이기도 하다.

내가 쓴 책은 이렇게 끝난다.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든, 이것만은 꼭 기억해 주세요.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은 모두 존엄하다는 거예요.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이 다르고,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이 달라요. 그리고 이건 그의 성별이나 젠더 정체성과는 무관해요.” 이 책은 2020년에 웹툰 <정년이>와 함께 ‘위험하거나 어둡다’는 평가를 받으며 ‘나다움 어린이책’ 목록에서 검열당했다. 정말 그런가? 판단은 여러분께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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