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원으로 할 수 있는 일

손희정 문화평론가

8월 말에 제주도에 다녀왔다. 아라동의 작은 서점인 ‘아무튼 책방’과 올해로 24회를 맞은 ‘제주여성영화제’에서 초대를 받아 3박4일 동안 총 4회 강의를 진행하는 일정이었다. 덕분에 오후와 저녁에는 강의를 하고, 밤에는 다정한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아침에는 바다 앞에서 ‘물멍’을 즐기는, 꽤 좋은 시간을 보냈다. 이후로 그 시간을 자꾸만 되돌아보게 되었는데, 첫 계기는 다큐멘터리 <물꽃의 전설>(2023)이었다. 고희영 감독이 2016년부터 2021년까지 제주 삼달리 바다에서 물질을 하는 해녀들의 모습을 기록해 엮었다. 작품의 중심에는 87년간 물질을 한 대상군 해녀 현순직 선생과 서서히 말라가는 바다의 슬픈 얼굴이 있었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손희정 문화평론가

1년에 한두 번 제주를 찾는 외지인에게 동서남북 사방이 모두 다른 제주의 바다는 그저 신비롭다. 이번에 묵었던 서북쪽의 아침 바다는 밝은 쪽빛이었다. 조금씩 물이 빠지는 오후에는 그 푸른색에 살짝 납빛이 돌았고, 바닷물이 다 빠지고 나면 현무암이 먹빛으로 반짝거렸다. 밤이 되면 한치잡이 배가 남청빛의 수평선을 따라 하얗게 불을 밝혔다.

온통 아스팔트뿐인 서울로 돌아온 지 며칠 안 되어 극장에 <물꽃의 전설>이 걸려 있는 걸 보고 바로 표를 끊었다. 지금 당장 제주 바다의 낭만적 풍광 앞으로 달려갈 수 없으니 스크린에서라도 한껏 즐겨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극장에서 만난 바다는 속편한 관광객을 위한 엽서사진이 아니라 이미 닥쳐온 파국에 대한 날카로운 경고장을 발신하고 있었다.

근처 공장에서 흘러나오는 폐수, 제주도 난개발, 전지구적 바다 오염 그리고 기후위기는 삼달리 앞바다에도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감태같은 해조류들이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고, 해조를 먹고 자라던 소라와 전복이 굶어죽었다. 남은 것은 보말뿐이라 너도 나도 채집하다보니 보말도 씨가 마르는 중이다. 2016년만 해도 꽃동산을 이루었던 물꽃(산호초) 역시 그 5년 사이에 사라졌다.

그렇게 사라져 ‘전설’이 되는 건 비단 바다 생명종만은 아니다. 그들의 생기에 의존했던 해녀들의 생계가 어려워지고 해녀 공동체가 사라진다. 그 경제활동에 기대고 있던 마을 공동체도 버텨내기 힘들다. 공동체가 무너진 곳에서 사람의 삶이 풍요로울 리 없고, 역사가 쌓일 리도 없다. 역사를 쌓지 못한다면 인간다움은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다큐가 아흔이 넘은 현순직 선생의 마지막 물질을 기어코 기록으로 남겨놓으려는 이유일 것이다. 그의 삶이 지금의 ‘우리’를 만든 역사이므로.

바다의 표면만을 즐길 뿐 그 안을 들여다보지 못했던 나의 관광객다운 얄팍함을 곱씹던 중 또 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4년도 예산안이 발표된 것이다. 국민독서문화증진을 위한 예산의 90%가 줄어들었는데, 그중에서 지역서점 활성화를 위한 예산 11억원은 전액 삭감됐다. 이뿐만 아니라 지역영화 지원 예산도 절반가량 축소됐다. ‘아무튼 책방’과 제주여성영화제에서 만난 사람들 얼굴이 떠올랐다.

전국의 동네서점은 도서 판매로 운영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생활문화시설로 지역 공동체에 기여하며 유지된다. 지원사업은 이런 활동에 좋은 마중물이 되어준다. 나 역시 그 덕에 제주에서 독자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그중에는 책과 영화를 좋아하는 10대 청소년들도 있었다. 지역 문화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이들의 정성이 손상된 세계에서 특별한 장소를 만들어낸다. 그 장소는 때로 사람을 살게 한다.

지역문화 예산 축소는 도서 판매업자나 영화인만이 아니라 책방과 극장에서 서로 만나고 문화를 향유하며 삶을 나누는 ‘국민’들에게 타격을 준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를 옹호하는 홍보영상에 10억원을 쓴 정부에 묻고 싶다. 바다를 죽이는 일보다는 사람을 살리는 일에 돈을 쓰는 것이 어떻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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