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고, 숨차고, 답답한

손희정 문화평론가

<알바트로스>. 2017년 방영된 TV 프로그램 이름이다. “어제의 청춘이 오늘의 청춘을 만난다”는 콘셉트로 기성세대인 MC들이 일일 아르바이트를 경험하고 청년들과 공감하는 예능이었다. 8회에서 진행자 유병재씨는 젝스키스의 장수원씨와 함께 유독 힘들기로 소문난 알바에 도전한다. “헬 알바” “골병만 남” 등의 후기가 넘쳐나는 이 일터는 다름 아닌 고등학교 급식실.

새벽에 출근해 “무겁고 뜨거운” 식판을 정리하고 600석이 넘는 홀을 청소한 뒤 1800인분의 점심을 조리하는 과정에 투입된 유병재씨는 뜨거운 불 앞에서 커다란 삽으로 양념에 절여져 한없이 무거워진 제육을 끊임없이 뒤집어야 했던 순간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간의 알바와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었어요. 정말 지옥에 온 것 같았죠. 쉬고 싶다고 멈출 수도 없고.” 그 장면에는 “제육 지옥”이라는 자막이 달렸다.

방송국 사람들은 하루의 촬영을 마치고 떠났지만, 그곳이 매일의 일터인 노동자들은 다음날도 똑같은 시간에 출근해 1800인분의 점심을 만들었을 것이다. 물론 오랜 시간 훈련된 급식 노동자들은 조리실을 지옥으로만 경험하진 않는다. 위험하고 힘든 일이기는 해도 ‘나의 일’이고, ‘가족의 생계’이며, ‘아이들을 먹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화면에는 급식 노동이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그 어려움에 공감하는 진행자들뿐만 아니라, 그 옆에서 빠른 손놀림으로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는 숙련된 노동자들의 모습 역시 담겨져 있었다. 그분들 덕분에 학생들은 제육볶음을 “지옥”이 아닌 하루의 낙, 점심시간의 즐거움으로 경험한다.

그런데 다음해인 2018년, 조리실이 은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지옥, 즉 ‘죽음의 공간’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학교 급식 노동자가 폐암으로 사망한 것이다. 2021년에야 그의 죽음은 산재로 인정받았는데, 지난한 산재 입증 과정을 통해서였다. 이어서 교육 당국은 2022년 방학에 맞춰 급식 노동자 폐 CT 전수 검사를 실시한다. 최종결과에 따르면 이상소견자가 32.4%에 육박하고, 폐암 발병률은 50대 여성의 평균보다 최고 16.4배 높다. 현재는 97명의 노동자가 폐암 산재를 인정받은 상태다.

데고, 베이고, 넘어지고, 부러지는 것까지는 몰라도, 조리 퓸(고온의 조리기구에서 발생되는 유증기와 유증기에 포함된 유해물질과 미세입자 등) 때문에 몸속까지 상할 거라곤 생각해 보지 않았던 노동자들에게 이 소식은 어떤 의미였을까? 믿고 일했던 일터가 지옥으로 바뀌는 순간 아니었을까? 최근 급식 노동자들의 퇴사율이 급격하게 올라가고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학교 급식 노동이 본격화된 것은 13년 전 무상급식 정책 아래서다. 무상급식은 진보정치의 어젠다였고, 한 걸음 성숙한 시민의식을 바탕으로 이루어낸 한국 민주주의의 성과이기도 했다. 그 성과를 매일의 노동으로 구현하는 이들의 안전과 건강을 담보로 한국사회가 ‘세계 최고 수준의 무상급식’을 자랑해 왔다니, 가슴이 서늘해진다.

동시에 먹이고 살리는 노동이 성별 분업 고정관념 안에서 여성들의 노동으로 여겨져 왔고, 그래서 또 저임금에 머물렀다는 사실도 지나칠 수 없다. 대부분의 급식 노동자는 50대 이상의 여성들이다. 폐암 발병률이 50대 여성 인구군에서 비교되는 이유다. 그런데 <알바트로스>에선 젊은 남성 조리장과 여성 영양사에게만 마이크가 주어질 뿐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제와 보니 꽤 상징적인 일이다. 한국 사회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오는 11월14일, 급식 노동자 당사자가 말하는 토크쇼 <뜨겁고, 숨차고, 답답한: 젠더화된 직업병, 학교급식 노동자의 폐암>이 열린다. 이제는 한국사회가 그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야 할 때 아닌가 싶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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