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 중도파들의 시대

손희정 문화평론가

“문화의 힘은 위대하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손희정 문화평론가

서울국제도서전 개막식을 찾은 김건희 여사의 말이다. 그날 그가 우아하게 축사를 한 행사장에서 송경동, 정보라, 이원재 등 문화예술인들이 강제퇴거당했다. 소설가 오정희씨의 도서전 홍보대사 위촉에 항의하던 중이었다. 오씨는 박근혜 정부 시절 ‘문학계 블랙리스트’ 실행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블랙리스트 자체가 문화의 힘을 통제하기 위한 검열이다. 그런데 그에 항의하는 목소리가 또다시 ‘권력자의 안전’을 이유로 삭제되었다. 그러고 보면 김 여사의 연설은 그 자체로 반어법의 가장 당대적인 퍼포먼스였다. 문화의 힘이 짓밟힌 자리에서 그것을 상찬했으니 말이다.

다음날, 나는 같은 자리에서 “예술, 소외, 검열”이라는 제목으로 토크를 진행했다. 시인 김선오, 아티스트 이반지하, 연극 연출가 신재, 이렇게 세 사람을 연사로 초청해 퀴어, 장애인, 채식인 등 존재 자체가 검열의 대상이 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검열이 일어난 자리에서 검열을 비판할 수 있을까? 허용되는 저항과 그렇지 않은 저항은 어디에서 갈리는가? 우리는 김선오 시인의 말처럼 “저항을 상품화”하는 자리에서 스스로를 팔고 있는 건 아닌가. 깊이 있는 화두를 던져준 연사들과 그 자리에 함께해준 열성적인 청중들이 아니었다면 황망했을 자리였다.

토크가 끝나자 한 청중이 손을 들고 마이크를 잡았다. “좀 불편할 수도 있는 질문을 하겠다”며 입을 연 그는 “소위 ‘비정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정상화하자는 극좌적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러다 보면 나치의 우생학처럼 우리 사회에서 비정상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극우적 생각도 정상화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우생학처럼 힘 있는 자들을 위한 논리가 과학의 지위를 얻어 소외시키고 죽여 온 사람들을 더 이상 죽이지 말자는 이야기가 우생학을 옹호하는 논리로 이어질 수 없다”고 답했고, 신재 연출가는 “나는 사상이 아니라 내 친구들이 차별받는 엄연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질문의 내용만큼이나 나를 괴롭힌 건 형식이었다. 어떤 ‘극단적’ 입장에도 치우치지 않는 합리적 중도로서 내가 당신들의 말을 평가할 수 있다는 그 태도 말이다. 요즘 어디에서나 이런 태도를 만날 수 있다. 기이한 중립 기어가 우월한 판단력의 증거처럼 사용되지만 그 바탕에는 비판과 저항의 맥락을 지우고 입장을 가지는 것 자체를 ‘극단’으로 치부하는 반지성적 몰이해가 놓여 있다.

이 난감한 풍경 앞에서 “극단적 중도파”(타리크 알리)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는 영국 노동당의 ‘제3의 길’이나 노무현의 ‘좌파 신자유주의’ 같은, 대안을 상상하기를 포기한 좌파 정치의 자살 행위를 뜻한다. 하지만 탈정치적 중도 표방은 더 이상 일부 정치 세력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의 끊임없는 실패 속에서 등장해 단단히 자리 잡은 악질적인 시대정신이다.

그러다 보니 공공기관 역시 중도파를 자처한다. 최근 인천시에서는 인천여성영화제에 퀴어 영화를 상영하려면 ‘탈퀴어 영화’도 상영하라고 압박을 넣었다. 퀴어는 사상이 아니다. 존재다. 도대체 어떻게 ‘탈퀴어’하란 말인가? 이는 퀴어에 대한 억압이자 검열이지만, 인천시는 ‘중립’이라는 형식을 취했다. 인천여성영화제는 이에 항의하면서 시의 지원 없이 영화제를 개최하기로 했다.

김건희 여사는 도서전에서 <펀홈>을 구매했다. 레즈비언 만화가 앨리슨 벡델이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갇혀 평생 자신이 퀴어임을 숨기고 살았던 아버지에 대해 그린 그래픽노블이다. 여당 지자체장들의 퀴어 배제 기조를 생각하면, 여사님은 이번에도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셨다. 혹은, 이런 소비야말로 여사님이 극단적 중도파의 시대에 선택한, 진심을 전달하는 방식이었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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