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제과의 어렴풋한 그림자, 가수저라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가수저라(加須底羅)는 깨끗한 밀가루 한 되와 백설탕 두 근을 달걀 여덟 개로 반죽하여 구리냄비에 담아 숯불로 노랗게 되도록 익힌다. 대바늘로 구멍을 뚫어 불기운이 속까지 들어가게 하여 만들어 꺼내서 잘라 먹는데, 이것이 최고의 상품이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이덕무(1741~1793)가 엮은 일본 지리지 <청령국지>, 그리고 그의 손자 이규경(1788~?)이 엮은 <오주연문장전산고>의 한 문단이다. 둘 다 일본의 음식 정보를 갈무리하며 쓴 내용이며, 둘 다 18세기 일본의 백과전서인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속 가수저라, 곧 카스텔라 항목 그대로다. 일본을 가본 적 없는 이덕무와 이규경이 남긴 가수저라 기록은 조선 후기에 떠돌던 중국 및 일본 경유 서양 제과의 어렴풋한 그림자일 테다. 서유구(1764~1845) 또한 <임원경제지>에 가수저라를 실었고 실제로 구워보기도 한 듯하다. 그렇다면 서유구가 구워 낸 그것의 물성과 풍미가 어땠을까? 알 수 없다. 서유구가 쓴 밀가루, 설탕, 달걀의 품질과 품위는 미궁이다. 설탕이 들어간 달걀의 거품에 잇닿은 제과 기술을 얼마나 이해하고 해냈는지도 미궁이다. 본격적인 오븐도, 16세기 나가사키에서 나온 카스텔라 전용 소형 오븐인 ‘히키가마(引き釜)’도 없이, 솥 또는 노구솥 또는 쟁가비나 벙거짓골쯤을 붙들고, 어떤 불을 어떻게 썼는지는 알 수 없다.

이윽고 1876년 조선이 공식적으로 문호를 개방하자 외국인의 방문과 거류가 폭증한다. 이와 함께 서양 음식이 밀려들었다. 왕실과 고위관리와 부자들은 바로 서양 음식, 과자를 탐하게 되었다. 왕실은 최고위의 식탐과 외교상 의전 때문에 아예 음식에 밝은 유럽 사람을 직접 고용하는 데 이른다. 앙투아네트 손탁, 엠마 크뢰벨 등이 그 예다. 예컨대 크뢰벨은 자신이 근무하며(1905~1906) 본 궁중 연회의 모습을 이렇게 써 남겼다.

“궁중의 공식 연회에는 프랑스식으로 꾸민 장식은 물론 입맛을 돋우는 각종 음식 역시 특별히 선정한 프랑스식 최고급 요리들이었다. 트뤼플 파스타, 생굴, 캐비어가 일상적인 음식이 되어 있었고, 풍미 넘치는 프랑스산 샴페인은 원산지의 어느 연회에서보다 훨씬 더 풍성했다. 조선 황실의 연회에 참석하면, 마치 서양의 어느 제후가 베푸는 연회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김영자 옮김, 엠마 크뢰벨, <나는 어떻게 조선 황실에 오게 되었나?>)

기록뿐이 아니다. 창덕궁에 남아 있는 시설, 국립고궁박물관 등이 소장한 19세기 말 제과 용구와 용기와 기명을 보고 있으면, 조선의 고종과 그 주변이 유럽 과자와 케이크를 매일 먹어치웠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이때 드디어 한국 제과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일까? 글쎄, 그 사물과 일상은 아직 조선인의 것이 아니었다. 이덕무의 가수저라만큼이나 어렴풋할 뿐이었다.

이로부터 한 세대는 지나야 조선의 제과제빵 기술과 그 관능을 설명한 조선 사람의 말글이 나타난다. 종사자도 나타난다. 음식 문화사는 극소수의 식탐의 총합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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