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가득 찬 감자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칠성문 밖 빈민굴의 여인들은 가을이 되면 칠성문 밖에 있는 중국인의 채마 밭에 감자며 배추를 도둑질하러, 밤에 바구니를 가지고 간다. 복녀도 감잣개나 잘 도둑질하여 왔다.” 평양 출신 김동인이 1925년 발표한 소설 ‘감자’의 한 구절이다. 이 감자는, 그런데 감자가 아니라 고구마이다. 오늘날 한반도에서, 3월부터 햇감자 나오기 시작해 사철 감자를 만날 수 있지만 두 세대 전만 해도 감자는 하지감자가 다였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감자는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다다른 이래 유럽으로 건너간 자원 가운데 하나다. 감자는 유럽에서 다시 인도와 중국 대륙, 한반도, 일본열도로 번졌다. 한반도 사람들은 이 자원에 감저(甘藷)·북감저·북저·토감저 등의 이름을 붙였다. 오늘날 한국인의 일상에는 ‘감저’에서 변한 ‘감자’가 완전히 자리를 잡았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들어온 ‘북감저-감자’와 일본에서 들어온 ‘남감저-고구마’의 이름을 둘러싼 혼란은 상당했다. 흙 속에서는 비슷해 보이는 데다, 전분에서 비롯한 물성이 겹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감자 기록 모두가 흥미롭다. 서유구는 <행포지>에서 “북저(北藷)는 근래 관북(關北, 함경도)에서 전래하였다. 번저(番藷, 고구마)에 비해 매우 쉽게 번식한다”라고 했다. 조성묵(趙性默)은 <원서방(圓薯方)>(1832)에서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오기는 북개시(北開市, 조·청 무역시장)의 영고탑(寧古塔,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시)에서다. 이것을 북감저(北甘藷)라 부른다. 본래 중국의 서남쪽이 원산지인데 여기에서 서쪽으로 또 북쪽으로 전파되었으며 마침내 동쪽으로까지 전해진 것”이라고 했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 ‘북저변증설’에 감자 전래에 얽힌 이설을 갈무리했다. 이규경은 한반도에 감자가 들어온 시기를 1824~1825년 즈음으로 추정했다. 그때 함경도 명천부 김 아무개가 북경에 가서 종자를 들여왔다는 설, 인삼을 캐러 몰래 조선 국경을 넘은 중국인들이 산속에 감자를 심어 먹다가 남겨진 것이 자연스레 퍼졌다는 설이 이미 존재했다.

감자는 기록되기 훨씬 이전에 들어왔을 테다. 이러나저러나 백두산 자락, 두만강 일대에 살던 사람들은 감자의 식량 가치를 금세 알아차렸다. 지식인은 쌀·보리·조에 버금가는 작물인 감자가 조선에 널리 퍼지길 바랐다.

감자는 들어오자마자 구황작물로 환영받았을 것이다. 감자는 익히기만 하면 한 끼가 된다. 겨우내 양식도 된다. 얼고 삭아도 전분을 내 먹을 수 있다. 감자전분은 이전에 없던 감자(녹말)국수, 감자전, 감자옹심이를 낳았다. 감자장떡, 감자범벅, 감자볶음, 감자조림, 감자밥, 감자떡, 감자죽, 감자부각, 감자청포묵, 감잣국, 감자탕 등의 바탕에 감자가 있다. 밥을 대신해준 데다 지난 200여년 사이 별별 새로운 음식을 낳았다. 음식 문화사 속 감자의 의의는 이렇게 요약할 만하다.


Today`s HOT
디엔비엔푸 전투 70주년 기념식 토네이도로 파손된 페덱스 시설 브라질 홍수, 대피하는 주민들 바다사자가 점령한 샌프란만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폭격 맞은 라파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파리 올림픽 보라색 트랙 첫 선!
호주 시드니 대학교 이-팔 맞불 시위 UCLA 캠퍼스 쓰레기 치우는 인부들 침수된 아레나 두 그레미우 경기장 휴전 수용 소식에 박수 치는 로잔대 학생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