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혜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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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홍준표의 김부겸 지지선언 더불어민주당 소속 김부겸 대구시장 예비후보와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막역한 관계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96년 15대 총선 직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래시계 검사’로 이름을 날리다 변호사로 활동하던 홍 전 시장은 여야 모두 탐내던 영입 대상이었다. 그중에서도 김영삼의 3당 합당과 김대중의 정계복귀를 모두 반대하던 꼬마민주당은 홍 전 시장 영입에 사활을 걸었다. 원외당직자이던 김부겸과 노무현 당시 최고위원, 이부영·제정구 의원 등 꼬마민주당 ‘설득조’가 1996년 1월 홍 전 시장 집을 찾아가 밤새 고스톱을 치며 “함께 정치를 바꿔보자”고 매달렸다. 홍 전 시장도 “그러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다음날 새벽 반전이 일어났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 “당신이 했던 일(슬롯머신 사건 박철언 구속 등)이 내 뜻과 맞지 않느냐”고 하자 그 자리에서 신한국당을 택한 것이다. 하룻밤 만의 변심에 얼굴을 붉혔던 김 후보와 홍 전 시장은 얼마 후 꼬마민주당과 신한국당이 합당해 창당한 한나라당에서 재회했다. -
단도직입 “여성 정치세력화 소홀했던 점 반성···윤석열의 총리 제안엔 ‘내게 수치’라고 거절” 1960년 경남 창녕 출신으로 MBC 첫 여성 경제부장·특파원·단독앵커였던 언론인 출신 정치인이다. 2004년 열린우리당 대변인으로 정치에 입문해 17~20대 국회의원(서울 구로을)을 지낸 4선 중진 의원이다.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정책위의장을 거쳐 2014년 민주당 첫 여성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을 맡아 검찰·사법개혁안을 주도했고, 2020년 문재인 정부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지냈다.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전략국제문제연구소 수석고문, 하버드 케네디스쿨 선임연구원을 역임했다. -
여적 이재명과 룰라의 ‘브로맨스’ 서로 비슷한 삶의 궤적을 공유한단 것은 적과 편으로 극명하게 갈리는 정치의 세계에서 특별한 힘을 발휘한다. 끊임없이 서로를 의심하고 검증해야 하는 정상외교 무대에서 동질감은 특히 중요하다. 직관적 신뢰와 강한 일체감으로 상대 의도를 파악하는 시간을 줄이고, 협상 테이블의 심리적 장벽을 낮춰 난제를 해결하는 결정적 동력으로 작용한다. -
논설위원의 단도직입 “서울의 건축 공공성, 표퓰리즘에 오염…이야기가 담긴 도시 만들어야” 김진애 국가건축정책위원장(73)은 정치인 출신 건축·도시 전문가다. 18·21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 자문 ‘건설기술 건축문화 선진화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88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에서 도시계획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뒤 행정신수도 기본계획, 산본신도시 도시설계, 인사동길 등 다양한 도시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서울性> <김진애의 도시 이야기> <딸들에 관하여> 등 도시·공간·사회를 주제로 30여권의 책을 출간했고, 최근 저서 <이토록_서울>을 통해 ‘공간 민주주의’를 강조하고 있다.서울은 흥미로운 도시다. 복잡다단하고 변화무쌍하며 역동적이다. 반면 문제도 이슈도 많은 도시다.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엔 이처럼 다양한 스토리를 가진 서울의 비범함이 곳곳에 등장한다. 이제 서울은 인구 1000만 대한민국의 수도 정도로 뭉뚱그려 말할 수 없는 곳이 됐다. 한 도시가 세계의 주목을 받을 때 뉴요커, 파리지앵, 런더너처럼 그 도시의 사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등장한다. 최근 ‘서울러’(Seouler)라는 말이 자주 들리는 건 진취적인 서울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
여적 하늘로 간 ‘대장 부엉이’ 이해찬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자 굴곡 많은 정치사의 거목이었던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지난 26일 세상을 떠났다. 1988년 재야 출신 1세대 정치인으로 7선 국회의원, 국무총리, 교육부 장관, 2차례 당대표 자리에 이르기까지 이해찬이라는 이름이 한국 정치에 던진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전 총리는 민주진보 진영의 유능한 설계자로 꼽힌다. 역대 민주정부 대통령 4명이 그를 중용했고, 선거마다 ‘불패’의 신화를 쓴 전략가로 회자된다. 책임총리제, 지역균형발전도 그의 손끝에서 시작됐다. 민주당 주류 정치가 주목하지 않았던 노무현·이재명 대통령의 진가를 가장 먼저 알아본 이도 그였다. -
여적 무상생리대 여성들에게 초경부터 완경까지의 40년은 자신의 몸과 사회가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알게 되는 시간이다. 변화한 신체를 불안해하는 10대, 힘들 땐 학업·노동 중단까지 고심하는 청년기, 임신·출산기, 공백·상실로 취급되는 완경기까지 여성의 전 생애를 걸쳐 몸의 질문은 계속된다. 여성에게 월경이란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이 아닌 교육, 노동, 인권 문제라는 뜻이다. 2000년대 등장한 월경권 운동은 월경하는 사람이 차별과 낙인 없이 일상에 참여할 권리를 말한다. 당시만 해도 월경은 사적인 일, 개인이 통제해야 할 문제로 치부됐다. 월경 관련 얘기는 친밀한 사이에서만 나누고, “너 생리하냐”는 말은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여성을 상징하는 여성 편견 용어였다. 이처럼 월경을 ‘재생산의 도구’ ‘여성의 시간’으로만 본 사회의 시선을 뒤집은 것이 월경권 운동이었다. -
여적 구룡마을의 눈물 지난 16일 새벽 5시쯤,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큰불이 났다. 빈집에서 발화된 불씨가 강풍을 타고 판잣집 수십 채를 순식간에 집어삼켰고 주민 180명이 집을 잃었다. 동트기 전 양재대로 차로를 통제하며 불길을 잡는 데만 6시간이 넘게 걸린 역대 최대 규모의 구룡마을 화재였다. “이제 더 갈 곳이 없어. 왜 우리는 맨날 만신창이로 살아야 하나.” 잿더미가 된 동네를 보며 한 이주민은 검게 그을린 손으로 눈물을 연신 훔쳐냈다. 30년 넘게 꾸역꾸역 살아온 삶의 터전에서 그가 챙겨나온 건 낡고 작은 가방 하나와 비닐봉지가 전부였다. 그것이 개발·저항·철거의 아귀다툼 경계선에서 평생 쫓기며 살아온 이의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
여적 보수의 당명 개정 1990년 2월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한 민주자유당은 보수 정당의 뿌리였다. 그러나 1992년 집권한 김영삼 정부는 하나회 철폐 등으로 3당 합당의 과오를 딛고 1995년 12월 민자당에서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꿨다. 신한국당은 1996년 15대 총선에서 139석을 차지해 당명 변경 효과를 톡톡히 봤다. 하지만 1997년 대선 한달 전인 11월 이회창 후보 아들 병역 문제, 이인제 후보 탈당으로 위기에 몰린 신한국당은 한나라당으로 탈바꿈했다. 비록 1997년 대선 패배로 사상 처음 야당의 길을 걷게 됐지만, 이회창 총재의 ‘강력한 야당’ 선언에 힘입어 한나라당은 15년간 장수했다. -
여적 전장연 시위 멈추게 한 ‘정치’ 내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할 때 누구나 약자가 된다. 약자의 언어가 빈약할수록 약자들 권리에 무심한 사회일 수밖에 없다. 특히 장애인들은 다른 약자들에 견줘 정상·표준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세상의 턱에 부딪히는 존재들이다. “세상이 알아들으려면 창문을 깨고 불을 질러야 한다”(서프러제트)는 말처럼 장애인운동이 거칠고 치열한 것도 이런 이유를 무시할 수 없다. 소수자운동이 당사자 운동으로 자리 잡기 전인 2001년 오이도역 장애인 추락 사고부터 이들은 이동권 보장, 권리 예산, 탈시설 운동처럼 실질적 권리를 확보하는 투쟁을 벌이며 ‘내가 누구인지’ 입증해야 했다. -
여적 이혜훈의 사과 인사는 보직 임명을 넘어 정권의 국정 철학과 정책 지향점을 드러내는 메시지다. 특히 반대 진영 인물을 중용할 경우 더 엄격하고 까다로운 질문을 받게 된다.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 지명 문제가 그렇다. 이재명 정부의 노선과 180도 다른 입장의 국민의힘 중진 정치인이, 그것도 요직인 기획예산처 장관으로 지명된 게 어떤 의미이고 무슨 맥락인지를 두고 논란이 분분하다. -
여적 대통령 정무특보 대통령 특별보좌관(특보)은 대통령의 국정을 자문하는 ‘무보수 명예직’ 고위 참모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 백악관의 ‘스페셜 어시스턴트’(Special Assistant)를 참고해 처음 도입한 제도다. 정치인·학자·외교관 등이 선임된 스페셜 어시스턴트는 정책 자문, 연설문 작성 같은 대통령 핵심 업무를 보좌한다. 상원과 대통령의 가교 역할처럼 실무조직이 접근하기 어려운 일이나 대통령의 특별한 관심사를 처리할 때는 대통령 최측근이나 거물급 인사가 그 자리를 맡있다. -
여적 ‘다시 청와대’ 시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 싣고 30리 시골길 시인의 집 놀러가는 대통령, 사람 상처 내는 탱크 기지가 들어올 수 없는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신동엽, <산문시>에서). 전쟁 같은 일상을 보내야 했던 1968년, 신동엽은 평화로운 나라를 꿈꾸며 이 시를 썼다. 하지만 당시는 시인의 기대처럼 ‘황톳길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을 가질 수 없었다. 대한민국은 이념·빈부·지역 갈등으로 바람 잘 날 없었고, ‘김신조 사태’ 후 박정희 정부는 하루가 멀다하고 멸사봉공을 강요했던 시절이었다. 그때 청와대는 국민 위에 군림한 정치, 민주주의를 위협한 독재의 온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