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이 지운 이름 ‘민주시민’

구혜영 정치부문장

알렉시 드 토크빌은 “선거에 의한 대의 공화제가 민주주의”라고 규정했다. 공익 논쟁의 무대가 민주주의이고, 이 과정에서 표출된 갈등을 다투면서 공익을 합의하는 게 정치(선거)라는 뜻이다. 이번 총선은 오래된 속설을 멀찌감치 비켜갔다. 가장 나은 후보를 가려내는 역할을 내던진 정당, 경쟁자를 적으로 간주한 정치인, 국가와 시민사회의 체인벨트 역할을 포기한 (무쟁점) 정치. 어디에도 정치와 민주주의의 권위는 없다. 한 정치학자는 “모든 정당, 보편적인 정치가 붕괴됐음을 확인한 첫 선거”라고 한탄했다. 주권자 입장에선 더 나쁜 세력을 막기 위해 덜 나쁜 세력에게 표를 준 선거로 변질됐다. 최선이 없다면 차선을 택했던 기존 선거와 달리 최악을 면하기 위해 차악을 골라야 했던 것이다. 차악이라 해도 ‘악’은 악이다. 악이 만들 세상에 대한 신뢰가 있을 리 없다. 선거 내내 자질 논란을 빚었던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지역구에서 승패 득표 차(2377표)보다 무효표(4696표)가 더 많았던 것이 이를 입증한다. 그런데도 총선 2주가 지나도록 승자의 성찰도, 패자의 반성도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2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신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을 소개한 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영수회담 등 현안에 대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2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신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을 소개한 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영수회담 등 현안에 대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은 참패 성적표를 받아들고 ‘정치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고도의 정치를 하는 자리가 대통령인데 정치를 하겠다니 무슨 소리인가. 만시지탄이지만 그간 정치를 하지 않았다는 자성일 수 있겠다. 실제 윤 대통령 집권 2년은 무능, 오만, 편향이라는 키워드로 요약된다. 총선 결과는 정치를 하지 않은 대통령에 대한 매서운 질책이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국정 메시지를 쉽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황스럽다. 쉽든 어렵든 소통의 내용이 잘못됐고, 국정기조를 안 바꾸면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게 총선 민심이다. 윤 대통령 반응은 이를 알고도 무시하거나, ‘윤석열 사태’에 준하는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윤 대통령은 ‘야당과의 소통’도 정치하는 대통령이 할 일로 꼽았다. 집권 당시 여소야대와 달리 지금은 윤 대통령이 만든 여소야대다. 여당은 21대 총선에 견줘 5석이 늘었지만 실질적 지표는 악화됐다. 개헌·탄핵 저지선을 겨우 넘긴 수준이고, 대통령은 여당을 장악하는 힘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 느닷없이 ‘박영선 국무총리 후보설’이 흘러나왔다. 윤 대통령이 박 전 장관을 총리로 임명하고 싶다면 야당의 양해를 구하고 거국내각 수준의 협조를 요청하는 게 우선이다. 친분 있는 야당 인사를 중용해 협치 모양새를 만들고, 이를 야당이 받으면 다행이고 받지 않으면 야당 탓 할 수 있다 생각했던 모양이다. 윤 대통령은 또, 집권 후 처음으로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게 회담을 제안했다. 잘한 결정이다. 하지만 만나기만 한다고 소통, 협치가 되는 건 아니다. 이번 회담은 정치 복원 신호탄이자 정치의 효용을 확인하는 자리여야 한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모든 의제를 열어놓고, 이 대표 말을 많이 듣겠다고 한다. 이런 방식은 대통령 지지율이 높거나 신뢰관계가 두터워야 가능하다. 지금이 그런 때인가. 회담이 총선 참패 위기를 모면하려는 반짝 이벤트가 아니라면 윤 대통령이 합의 가능한 의제 설정에 적극 나서야 하고, 필요하다면 지지층을 설득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채 상병 특검, 의·정 갈등부터 서둘러 해결해야 한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정당 득표율 차(5.4%포인트)는 4년 전 총선에 견줘 3%포인트 줄었다. 민주당은 조국혁신당의 지민비조 덕을 톡톡히 누렸다. 169석으로 원내 1당을 굳힌 민주당이 자력 승리라 착각하면 안 되는 이유다. 그런데 민주당은 예상 경로를 이탈하고 있다. 총선에서 이기고도 지도부 총사퇴라는 납득 불가 상황이 발생했고 새 지도부는 주류 단일 대오로 채워졌다. 이재명 대표 연임 논란이 국회의장 경선전까지 번지고 있고, “협치는 없다”는 반정치 메시지가 커지고 있다. 하나같이 총선 민심을 받드는 자세라고 볼 수 없다.

특히 조국혁신당은 민주당 진로의 변수가 될 수 있다. 총선 결과, 호남에서 민주당은 조국혁신당에 밀렸다. 호남 표심은 민주당에 대한 채찍질이라기보다 조국혁신당을 대체재로 선택한 것이라는 분석이 중론이다. 민주당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강성 지지층 목소리만 듣고, 당내 이견을 봉쇄할 경우 조국혁신당이 반명·비명 그룹의 플랫폼이 될 수 있다. 벌써부터 김경수 전 경남지사 사면·복권설이 나오고 있고, 민주당 일부 인사들의 입당 문의도 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총선 때 약속한 교섭단체 기준 완화를 백지화할 기세다. 당 안팎 통합 노력을 소홀히 하는 것, 이 역시 총선 민심에 대한 역행이다.

아직 총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헛헛하다고 한다. 주권자인 내가 투표권을 가진 정치 고객이었을 뿐 민주시민으로 대접받지 못해서라면 가혹한 생각일까. 견고한 진보주의자 홍세화 선생이 18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배제된 자들과 민주시민의 간극을 줄이는 데 평생을 걸었다. 그가 품었던 ‘우리가 싸우는 과정 자체가 그 싸움을 통해 획득하려는 사회와 닮아야 한다’는 말을 되새긴다. 주권자를 민주시민 자리에서 내몬 지금 정치가 답해야 할 질문이고 기꺼이 감당해야 할 숙제다.

[구혜영의 이면]총선이 지운 이름 ‘민주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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