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싫다’

구혜영 논설위원

2010년대 중반 페미니즘 리부트 운동이 일어났을 때 젊은 여성들은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죄와 벌)라는 구절을 소환하며 김수영을 여성혐오 시인의 첫 줄에 세웠다. 반면 2013년 무렵 ‘안녕들 하십니까’ 릴레이 대자보가 나붙던 시절엔 언론자유를 다룬 그의 시(김일성 만세)를 패러디한 글이 쏟아졌다. 김수영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과 분단, 4·19 혁명과 반동을 겪은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시대와 불화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갔다. 포로수용소에 2년이나 갇혔던 자신을 친공 포로도, 반공 포로도 아닌 민간 억류인이라 했던 것처럼. 적당히 뭉개지 않고 평생을 시대의 이분법과 싸운 현재진행형의 시인 김수영은 그래서 가장 정치적인 시인으로 꼽힌다.

화룡점정은 1964년 발표한 ‘거대한 뿌리’다. 4·19 혁명, 5·16 군사쿠데타 이후 혼란과 불안이 난무한 시대였다. 박정희 정권은 산업화·근대화로 가는 산뜻한 출발을 위해 내치고 없애야 할 목록을 만들었고 이를 반동으로 치부했다. ‘거대한 뿌리’는 반동의 명단을 하나하나 호명한다.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구리개 약방, 피혁점, 곰보, 애꾸, 무식쟁이…. 그러나 김수영은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며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고 했다. 아무리 하찮은 전통이라도 민중의 삶은 지켜야 한다는 저항이고, 또 무수한 반동을 구분하는 안목 없인 변화하는 시대에서 중심을 잡을 수 없다는 역설이다.

4월 총선을 앞두고 김수영을 불러들이고 싶었다. 그의 과거는 지금도 유효하고, 그래서 그의 화두는 지금 정치가 답해야 할 질문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반동으로 밀려났지만 지켜야 할 전통, 진짜 반동이라 버려야 할 전통이 무엇인지 지금 정치는 답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못할 것이다. 온갖 노골적인 반동이 대신 말해주고 있다.

17대 총선 이후 정치권은 국민 공천을 시도했다. 중간중간 변주는 있었을지언정 국민 주권을 귀하게 여겼는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한 분위기다. 이는 내부 권력의 주류 교체가 급한 절대 존엄들의 사당화 탓이 크다. 여권에선 대통령이 집권여당 대표 사퇴를 압박하는 일쯤은 다반사고, 당 지도부는 검찰·친윤 낙하산 공천에 신경 쓰고 있다. 민주당은 대의원제 폐지를 시작으로 친명 줄세우기 공천이 노골적으로 횡행한다. 그리 곤욕을 치르고도 검증에서 성비위 의혹 연루자를 통과시키고, 대표 측근들의 사천(私薦)도 용인한다. 심지어 난민법·차별금지법 반대로 정치혐오를 확산했던 이언주 전 의원의 복당을 외연 확대라고 치켜세운다. 정권심판론이 민주당 정체성이라는 말인가. 사당화에 줄선 후보들은 자기 철학보다 절대 존엄 보위에 사활을 걸게 된다. ‘국민의힘·민주당답지 않은 후보’를 깨려 출마하고, 주머니 속 공깃돌 다루듯 지역구를 옮겨다니는 행태에도 부끄럼이 없다. ‘주권자의 위임을 받아 정당성을 얻는’ 국민 주권을 더러운 전통으로 만들어 탕진하는, 기막힌 반동이다.

이러니 거대 정당이 선거제를 통합·연대 정치의 틀로 만드는 데 신경 쓸 리 있겠는가. 준연동형제의 오남용을 반성하긴커녕 국민의힘은 ‘병립형’만 외치고, 민주당은 입장조차 밝히지 않고 있다. 최근엔 소수정당에 의석을 나눠주고 이중등록제를 허용하는 ‘권역별 병립형 비례제’ 합의설까지 나온다. 영호남 지역주의 해소를 내세우고 산적한 정치개혁 문제를 덮으려 한다. 몰염치나 다름없다. 좌절과 상실로 끝난 촛불 정치연합을 되살리려는 몸부림을 하찮은 전통으로 취급하는, 그야말로 거대한 반동이다.

석 달 남짓한 총선 국면에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충돌했다. 총선 준비에 애타는 당을 뒤흔든 대통령, 집권 초반 조기 차별화를 노린 당대표도 처음이지만 대통령 부인 방탄을 위해 공개 혈투를 벌이는 것 자체가 국민 모독이다. 양측은 충돌 이틀 만에 220여개 점포가 불탄 서민들의 가난 앞에서 악수 했다. 앙상한 골조만 남은 통곡의 현장에서 화해식을 치르다니. 권력투쟁이든 약속대련이든 국민을 정치적 배경으로 삼겠다는, 최악의 반동이다.

혁명의 열망이 좌절될 때 반동이 온다. 김수영은 반동을 긍정해야 다시 혁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피혁점, 곰보, 애꾸, 무식쟁이와 같은 비루한 전통을 끌어안은 자리에 ‘거대한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반동이 ‘싫다’. 지켜야 할 전통, 버려야 할 전통도 가닥을 못 잡는 이 모든 무수한 정치의 반동이 ‘싫다’.

구혜영 논설위원

구혜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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