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처럼 가릴 수 없는 말들

특정 단어를 언급하지 않고도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어느 날 글쓰기 수업에서 나는 어린이들에게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을 골라달라고 요청했다. 어린이들은 주섬주섬 자기 취향의 이미지를 들고 왔다. 사람일 수도 있었고 동물일 수도 있었고 물건일 수도 있었다. 어떤 사진을 골랐는지 서로 보여주지 않는 게 규칙이었다.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써보자고 제안했다. 다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존 버거의 책 <글로 쓴 사진>과 비슷한 서술 방식을 연습하려는 의도였다. 글을 완성시킨 열두 살의 서영이가 사진을 가린 채 자기 문장을 읽어주었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부글부글 타오르는 불을 상상해봐. 불은 말이지, 아주 뜨겁고 때로는 위험한 거야. 무언가를 강요하는 듯한 색깔이기도 해. 왜 그런 거 있잖아. 엄마가 화나면 튀어나오는 색 말이야. 하늘에 그 색깔이 있는 거야. 그런 걸 ‘노을’이라고 불러. 지금 네 앞에는 귤이 놓여 있어. 귤을 만져봐. 그런 걸 둥근 모양이라고 해. 이제 위에서 말한 노을 색을 둥근 모양과 합치는 거야. 이 모든 것은 매우 매우 커. 크다는 건 뭐냐면… 너의 집을 떠올려봐. 아무리 작아도 너보다는 크겠지. 하지만 이것은 집보다도 몇만 배 넘게 커. 어마무시하게 거대한 거지. 이게 있어서 우리는 살아갈 수 있어.”

서영이가 들고 있는 사진 속엔 무엇이 담겨 있을까? 당신도 짐작하다시피 그건 바로 태양이었다. 태양을 이런 식으로 묘사한 글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지만 내 머릿속엔 이글이글 타오르는 커다랗고 둥근 태양이 아주 선명하게 그려졌다. 이 어린 스승은 대상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도 대상에 관해 설명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다. 대상과 유사한 특징을 가진 다른 개념들을 자기 삶에서 끌어오면서 그걸 해냈다. 서영이에게 태양은 실체보다 더 풍부한 의미를 지닌다. 태양이라는 단어에 다 담을 수도 없을 만큼 커다란 의미를 말이다.

교과서의 퇴보 똑똑히 기억할 것

서영이의 삶은 태양과 관계 맺으면서 12년간 흘러왔다. 함께 볕을 쬔 사람과, 홀로 노을을 바라보던 저녁과, 해를 닮은 엄마와 과일과 사물이 그의 인생에 있었다. 언어는 이러한 관계를 설명하게끔 만든다. 어린이들은 말을 배우며 세계의 조각들이 서로 연결된 방식을 이해한다. 말이란 세계의 질서이므로. 나의 소설 <가녀장의 시대> 역시 주인공 아이가 가부장으로부터 말을 배우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아이는 가부장의 언어에 의구심을 품었다가 시간이 흐른 뒤 새로운 말들을 고안해낸다. 지난 시대의 말 중 어떤 것들은 현재의 세계를 정확히 담을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가녀장의 시대>는 가족 서사일 뿐 아니라 언어투쟁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1월9일 교육부는 2022 개정 교육과정 행정예고안을 공개했다. 그에 따르면 2025년부터는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쓰이는 표현이 바뀐다. 우선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로 수정됐다. 자유민주주의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내걸었던 단어이기도 하다. 윤석열 정부가 즐겨쓰는 ‘자유’란 주로 시장과 기업과 자본가와 노동시장 상층부를 장악한 사람들을 향해 있다. 노동시장의 하층부, 빈곤층,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어린이 등의 자유에 대한 무관심은 노골적일 지경이다. 노동하는 사람을 능동적 주체로 인정하는 ‘노동자’라는 말도 개정안에서 사라졌다. ‘성평등’과 ‘성소수자’도 사라졌다. 자유와 평등을 위한 그간의 치열한 투쟁을 지우는 변화다. 이를 두고 인권위는 인권 담론을 후퇴시킨다며 우려했으며 전국역사교사모임 소속 교사 1000여명이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그러나 결정권은 국가교육위원회로 넘어갔다. 근미래의 교과서는 세계의 커다란 일부를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필독서가 될 터다.

그에 맞서는 언어로 말을 부숴야

이것은 명백히 퇴보다. 그러나 현 정부가 퇴보하는 와중에도 어린이와 청소년은 자라난다. 이 퇴보를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어떤 말이 지워졌는지 잊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지워진 말을 아이에게 가르치길 멈추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의 사유가 편협하고 빈약한 언어에 한정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라영 작가는 <말을 부수는 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권력의 망언이 난립하는 가운데서도 이에 맞서는 언어들도 지치지 않고 생성된다. 바로 그 지점에 나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태양만큼이나 중대한 민주주의와 노동자와 성소수자를 가린 교과서에서도 어떻게 그것들을 똑바로 보게 할까? 언어가 모자라 보일 만큼의 관계 맺기를 어떻게 마련할까? 교과서 바깥의 어른들에게 남겨진 과제다. 우리는 손으로 가릴 수 없는 거대한 볕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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