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모르는 수장들

국정감사와 함께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국정감사는 매년 국회의원들이 정부 부처와 기관들을 대상으로 제대로 국정을 수행하고 있는지 질문하는 자리다. 국감의 대화는 일상적이거나 직관적이지 않다. 일반 시민들이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 용어와 통계 자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시정된 것들이 우리 일상을 쥐락펴락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러므로 시간 내서 국감 영상을 챙겨본다. 우위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절박한 문제들이 테이블 위에 오른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국정감사 영상에서 내가 감지하는 것은 일종의 매너리즘이다. 날 선 어조로 공수를 주고받기는 하나 그들은 이런 자리에 익숙해보인다. 대부분 크게 흔들리지 않는 채로 길고 긴 문답을 이어간다. 그것을 이성과 평정심 혹은 프로 의식이라는 말로 일축할 수 있다면 나도 좋겠다. 하지만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이다. 이 시각 국감에 모여앉은 저 어른들에게 떠오르는 풍경이 있을까? 텍스트와 숫자 말고, 얼굴과 장면 말이다. 어떤 정책을 거론할 때마다 가슴을 아프게 하는, 단어마다 자꾸 걸려넘어지게 하는 누군가가 그들 마음속에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들이 내뱉는 문장은 지금보다 생생하게 뛸 것이다. 나는 ‘진짜 질문’과 ‘진짜 대답’을 그리워하며 국회방송을 시청한다.

길고 긴 국정감사 중 잊을 수 없는 장면 하나를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10월7일 기획재정위원회가 한국은행을 대상으로 한 감사였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에게 가계 부채에 관해 질의했다. 나는 후원회장으로서 장 의원의 행보를 유심히 따라가는 중이다. 이날 국감에서는 여러 의원들이 절대적으로 증가해온 가계 부채를 우려했다. 현재 한국은 가계부채 비율이 200%가 넘은 나라다. 부채는 증가됐고 상환 능력은 악화됐다. 반면 취약 계층을 위한 사회안전망은 탄탄하지 않다. 한국의 복지 지출은 OECD 국가 평균의 절반가량이고, 코로나19 시국에도 재정지원보다는 금융지원으로 일관했다. 쉽게 말해 정부는 빚내서 버티라는 입장이었다.

잊을 수 없는 장혜영 의원의 침묵

그 와중에 금리가 올랐다. 이창용 총재도 이러한 상황을 인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은행이 지난달에 발표한 금융안정상황 보고서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다만 저소득 가구의 부담은 상대적으로 클 것이다.” 장 의원은 이 총재에게 다른 자료를 제시한다. ‘대출나라’ 사이트를 분석한 자료다. 대출나라는 대부 업체를 연결해주는 여러 플랫폼 중 하나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이들이 급전을 빌리기 위해 이용한다. 한 달에만 무려 1만2000건의 게시글이 올라오고 있다. 신규 글은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다. 자료를 내밀며 장 의원은 말한다. “더 심각한 건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올리는 금액의 분포가 달라졌다는 거예요. 3년 전만 해도 100만원에서 200만원이 필요하다고 올리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거든요. 그런데 올해는 21만원에서 40만원 사이의 금액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어요. 이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총재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며 말끝을 흐린다. 그리고 7초쯤 침묵이 흐른다. 장 의원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한다. 해야 할 말을 잊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슬픔 때문이다. 자신이 내민 통계가 실제로 어떤 풍경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다면 어떻게 목메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침묵을 잊을 수 없다. 침묵이 시끄러울 수 있다는 걸 당신도 알 것이다. 침묵과 동시에 발생한 것은 지루해하던 수장들이 당황하는 소리이며 시선이 한곳에 모이는 소리다. 누군가 조롱하듯 그를 바라보는 소리이며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들이 왜 여기에 앉아 있는지 알아차리는 소리다. 장 의원은 빠르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한다. “저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다는 의미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종류의 자료는 한국은행에도 금감원에도 없어요.” 그리고 국감은 이어진다. 장 의원은 취약계층을 위해 어떤 지원방안을 마련하고 있는지 물은 뒤, 늘 하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사회안전망 강화를 강조한다.

약자와 함께할 수장은 없는 걸까

중요한 결정권을 쥔 자들은 어떤 어른들인가. 그들은 어떤 타인을 끔찍이 사랑하는가. 그들을 눈물짓게 할 타인은 누구인가. 21만원에서 40만원 사이의 돈을 빌릴 누군가가 주변에 없는 사람. 그들이 대폭 늘어났다는 정보를 소리 내어 말하면서 고통을 느끼는 자만 슬픔에 목이 잠긴다. 한국은행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저소득층은 상대적으로 부담이 클 수 있다”라는 건조한 문장으로 결코 표현되지 않는 고통 말이다. 나는 이것에 슬퍼하는 수장들을 원한다. 취약한 친구와 이웃과 동료를 곁에 둔 수장들을 원한다. 가장 취약한 이들의 해방과 자신의 해방이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수장들을 원한다. 그런 수장들만이 숫자 속에서 취약한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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