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밝은 어느 독자를 생각하며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마음의 눈으로 보라는 이야기 같은 거 되게 싫어한다고 성은씨는 말했다. 그 말은 시각장애인인 성은씨와 친구들 사이에서 농담거리가 된다. “마음의 눈으로 보지 그래?” 그들은 서로를 놀리고 웃는다. 성은씨는 앞도 뒤도 위아래도 볼 수 없지만 눈이 어둡다는 표현은 그에게 적절하지 않다. 성은씨의 세계는 오히려 사방이 환한 느낌에 더 가깝다. 그는 형광등처럼 하얗게 밝은 시야 속에서 살며 밤에도 불을 켜지 않고 집 안을 거닌다. 그에게 빛이란 소용없는 무엇이다. 하지만 전맹인으로 살아가는 성은씨도 매일의 날씨를 알아차리고 대화를 건넨다. “오늘은 피부에 볕이 많이 닿네요.” “오늘은 날이 흐리네요. 바람도 축축하고요.” 그건 날씨를 만지며 감각하는 사람의 언어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성은씨에게는 고도로 발달된 청각과 촉각이 있다. “아유,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도통 모르겠다”고 농담하며 웃지만 사실 밤낮을 명확하게 감지한다. 그는 밤을 좋아한다. 밤은 소음이 줄어드는 시간이다. 눈을 감듯 귀를 감을 수는 없어서 듣기 싫어도 들어야만 했던 소리들이 잠잠해진다. 그런 시간에 성은씨는 책을 읽는다. 정확히는 책을 듣거나 만진다. 책들은 대체로 예의 바르게 말하는 것 같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의 아빠는 인쇄소에서 일했다. 그가 아직 약시였을 때, 그러니까 완전히 실명하기 전이었던 어린 시절에 아빠는 교과서를 크게 확대해서 인쇄한 뒤 제본해 주었다. 시력이 약해지는 딸을 위해 큰 책을 만드는 인쇄소 직원을 상상하면 나는 내가 몸담은 출판업계를 더욱 애정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전맹에 가까워지자 성은씨는 점자 읽기를 훈련했다. 문장들이 그의 손끝으로 흘러들어왔다. 어른이 된 그는 유창하게 외국어를 구사하듯 점자책을 훑는다.

대체 텍스트는 이동권만큼 중요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만지는 게 낫다고 성은씨는 말한다. 그는 이료 교사다. 안마, 지압 등의 수기 요법을 전문적으로 배웠고 가르친다. 의식적으로 손을 쉬게 해야 할 만큼 손으로 해내는 일이 많다. 함께 걸을 때 나는 오른쪽 팔꿈치를 그에게 건넨다. 그가 왼손으로 내 팔꿈치를 잡으면 내가 반보 앞서서 먼저 출발한다. 우리는 천천히 동행한다. 나는 묘사에 충실한 소설가처럼 말하며 걷는다. “1미터 앞에 낮은 턱이 있어요. 그다음엔 뾰족한 자갈밭이 이어져요. 우리는 나무 쪽으로 갈 거예요. 진녹색 이파리가 무성한 나무예요. 저는 비둘기색 원피스를 입었어요.” 그와 걷다보면 거리의 모든 색과 굴절이 새삼스럽다. 성은씨는 훈련된 청각과 촉각을 동원하며 울퉁불퉁한 세계를 횡단한다. 언젠가 성은씨가 나의 글을 점자 프린터로 인쇄해서 손으로 만지며 낭독해준 적이 있다. 그는 <점자로 쓴 다이어리>를 집필한 작가이고 ‘일간 이슬아’를 구독하는 맹인 독자다. 아직까지는 그가 유일하지만 앞으로 더 많은 시각장애인들과 만나려 한다. 글쓰기가 독자에게 장면을 바치는 일이라는 사실은 나에게 점점 더 절절해진다. 나는 종이책을 사랑하여 출판사를 차렸지만 이젠 종이책과 전자책을 동시에 출간하기 위해 애쓴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대체 텍스트는 이동권만큼이나 중요하다. 어디든 언어 없이는 가볼 수 없는 곳들투성이다. 언어에서 멀어지면 타자와 멀어지고 자기 자신과도 멀어지게 된다. 그것은 세계와 멀어진다는 말과도 같다.

‘기다린다’는 동사를 빼고 그의 독서 일대기를 설명할 수 있을까. 시각장애인은 비장애인처럼 모든 책에 접근할 수 없다. 읽고 싶은 책을 읽기 위해 그는 기다려야 한다. 음성지원이 가능한 전자책 혹은 점자책으로 제작될 때까지. 언어 특성상 점자책은 같은 내용도 묵자책보다 두꺼운 분량이 된다. 소장도 보관도 쉽지 않다. 성은씨가 도서관을 애용하며 살아온 건 그래서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을 위해 점자화되는 책은 일부다. 신청해도 몇 달이나 걸린다. 그런 점에서 전자책과 웹소설 시장의 발전은 고무적이지만 훌륭한 콘텐츠와 기기가 출시되어도 여전히 제약이 많다. 앱 내 결제 과정 또한 시각장애인 혼자 해내기가 어렵다고 한다.

시각장애인 위한 얘기 늘어나야

장애인 정보 접근성은 기술의 발전 속도만큼 좋아지지 않았다. 창작자와 개발자가 더 많은 시각장애인을 만나야 하는 이유다. 존중은 ‘마음의 눈’ 같은 말로는 구현되지 않는다. 성심성의껏 대체 텍스트를 마련하는 게 비장애인이 할 일이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죽을 때까지 다른 언어를 배우고 헤아리는 것이다. 언어란 모두에게 영원한 슬픔이자 기쁨이므로.

맹인을 위한 이야기는 더 충분해져야 한다. 눈 밝은 나의 동료 성은씨와 닮은 독자가 여기저기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은 채로 책을 만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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