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저팬’에서 일본의 몰락으로?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일본여행 붐이 가히 폭발적이다. 한 업체가 지난 11월 팬데믹 이전에 비해 항공권 판매가 많이 늘어난 지역 랭킹을 조사했더니 오사카·삿포로·후쿠오카·도쿄·오키나와로, 1위에서 5위까지가 모두 일본이고, 일본을 찾는 외국인 중 대략 3분의 1은 한국인이라 한다. ‘노 저팬’을 외치며 한국인 사장과 종업원이 일하는 이자카야 가는 것도 뭐라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정말 ‘다이내믹 코리아’다. 그때 앞장서 ‘일본 보이콧!’ 하던 사람들 중에, 일본여행 규제가 풀리자 맨 앞에서 일본행 티켓을 끊은 분들도 있을 것이다. 뭐 다 옛날 일이니 딱히 뭐라 하는 건 아니다.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이런 폭발적인 일본여행 붐을, 그 보이콧의 시각에서 비판하는 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다는 점이다. 보이콧 운동의 불씨로 삼았던 문제들 중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달라진 것은 엔화가 엄청 싸졌다는 것뿐이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나는 대일 보이콧 운동이 한국 정도 되는 국가가 선택할 수단이 아니고, 효과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일본 가지 말고 보이콧 정신을 되살리자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그 요란했던 보이콧 운동은 어딜 가고, 빗장이 풀리자마자 ‘나 빼고 다 일본여행 가더라’는 현상이 생긴 것에, 왜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지 궁금할 뿐이다. 하긴 분위기 타면 한번 질러보고, 분위기 바뀌면 쌩 돌아서도 누가 뭐라는 사람 없으니, 그쪽이 잘 사는 것일지 모르겠다.

일본 정부가 5년 뒤인 2027회계연도 방위 관련 예산을 국내총생산(GDP)의 2%로 늘린다고 한다. GDP의 2%는 11조엔(약 106조원) 규모로 올해 방위비(5조3687억엔)의 약 두 배다. 기시다 총리는 상대방의 공격을 단념시키는 ‘반격 능력 확보’를 공공연히 입에 담았다. 일본이 전후 77년간 평화헌법 체제하에서 적어도 군사 분야에서만큼은 살얼음판 걷듯 조심해온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 이 뉴스는 충격적이다.

조선이 거의 비무장에 가까운 나라였던 데 반해, 도쿠가와 시대 일본은 인구의 5%가 상시 무장을 하고 있던 국가였다. 이 상태는 1876년 메이지 정부가 폐도령(廢刀令)을 내릴 때까지 지속되었으니, 아마도 일본은 전 세계에서 가장 늦게까지 지배층에게 상시 무장을 허용했던 나라일 것이다. 이러니 일본은 ‘무위(武威)의 나라’라는 걸 자기정체성으로 삼았다. 그에 비해 조선·중국은 ‘소매가 긴 나라(長袖國)’라고 비꼬았다. 이 두 나라의 지배층이 긴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전투와는 거리가 먼 존재들임을 꼬집은 것이다. 일본이 볼 때 조선·중국을 무찌르는 것은 ‘마른 나뭇가지를 꺾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맥아더의 미군정은 이런 나라에서 군대를 빼앗아버렸다. 군대와 전쟁을 포기하게 한 평화헌법 9조다. 일본인의 아이덴티티 중 하나였던 ‘무위’가 사라진 것이다. 평화헌법이 일본인의 이성으로 유지되어 왔다면, 기시다 내각의 군비증강은 일본인의 감성을 찌른다. 한국의 매스미디어가 입버릇처럼 말하듯 일본이 군국주의로 회귀하려 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미국의 힘이 엄존하고, 전후 민주주의를 지탱해 온 유권자들이 있는 한 불가능할 것이다. 말하고 싶은 것은 일본을 무장 해제시켰던 미국이 일본이 군사비를 배로 올린다고 해도 반기는 눈치고, 총리가 적국의 기지를 타격할 수 있다고 한 그 적국이 북한이 될 수도 있는 이 엄청난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나갈 것인가다.

보이콧 운동이 시들해지더니 최근 일본의 ‘몰락’을 말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미국도, 중국도, 유럽도 그것을 얘기하지 않는데, 우리 유튜브를 보면 일본은 곧 망할 나라다. 내가 보기에 일본은 ‘쇠퇴’는 해도 ‘몰락’할지는 모르겠다. 쇠퇴와 몰락의 차이를 모르겠다면 더 할 말 없다. 그나저나 일본여행 가는 분들은 잘 다녀오시라. 나도 곧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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