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이달 초 혁명비교연구회에서 주최한 학회 참석차 도쿄에 다녀왔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일본, 이란, 아랍, 미국 등 8개 지역에서 벌어진 혁명을 비교하는 모임으로 다양한 국적의 연구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열띤 토론을 벌였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이 학회에 참가하면서 내게는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문제의식이 하나 있었다. 왜 ‘한국혁명’은 없는가? 메이지유신은 1868년에 일어났으니 한 150년쯤 됐는데, 150년 전의 조선(대원군 치하)과 지금 한국의 변화 정도를 비교하면, 일본은 물론이고 다른 어떤 나라도 명함 내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1860년대 이전 일본을 지배했던 유력가문 상당수는 지금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데, 한국은 지배층에서 거의 사라졌다. 오늘날 한국의 정계, 관계, 재계를 주름잡는 집안들은 죄다 신흥가문들이다.

이런 폭의 변화를 혁명이라고 하지 않으면 뭐라 부를 수 있을까. ‘혁명’이 없었던 건 아니다. ‘동학농민혁명’에서 ‘4·19혁명’ ‘5·16혁명’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너도나도 ‘혁명’이다. 그러나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혹은 메이지유신(최근에는 메이지혁명, 유신혁명이라는 호칭이 늘어나고 있다)에 필적할 만한 혁명은?’ 하고 묻는다면 답이 궁해진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호칭을 쓰는 사람 누구도 ‘한국혁명’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이번 학회에서는 ‘장기혁명’에 관한 논의가 많았다. 어떤 정치적 사건을 중심으로 단기적으로 파악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촉발시킨 발단에서부터 격변이 수습되어 새로운 체제가 궤도에 오르는 시기 전체를 혁명 과정으로 설정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혁명은 수십년간의 변혁 과정으로 파악되게 되고, 어떤 경우는 100년이 넘는 과정으로 보는 시각도 생길 수 있다. 그렇다면 근대 한국 100여년의 역사도 장기적 혁명의 과정으로 볼 수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주저하게 되지? 하나는 한국혁명을 상징할 만한 극적인 정치적 사건이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프랑스혁명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 메이지유신의 왕정복고 쿠데타 같은 뭔가 그 전후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을 만한 정치이벤트가 한국에는 없었다. 또 하나는 혁명의 주체세력 문제가 있다. 어떤 변혁 과정을 혁명이라고 하려면 뚜렷한 주체세력을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 분열하고 경쟁하더라도 혁명 목표를 향해 헌신하고 돌진하는 혁명 주체세력 말이다. 프랑스의 자코뱅·지롱드당·로베스피에르, 러시아의 볼셰비키·멘셰비키·레닌, 일본의 사쓰마·조슈·사이고 다카모리 등등. 이들을 기억하면서 사람들은 혁명에 감정이입하고 그 대의를 학습하며 그 역사인식을 내면화해 간다. 당연히 이들 관련 삽화들이 이 나라들의 화폐를 장식한다. 한국에는 레닌도, 사이고 다카모리도, 미라보도, 국민당도, 공산당도 없다. 그러니 지폐에도 동전에도 110년 전 불명예스럽게 퇴장한 왕조의 인물들만 박혀 있다. 그렇지만 한국은 혁명 없이도 혁명적으로 변화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회의 마지막 날 총괄토론을 한 와타나베 히로시(渡邊浩) 도쿄대 명예교수의 발언이 힌트가 되었다. 혁명 대신 ‘big rapid change’, 즉 ‘거대하고 급속한 변혁’이란 호칭을 쓰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와우! 한국 근대사에는 딱이다. 딱히 혁명이라 부를 만한 일은 없었지만, 한국이 겪은 지난 100여년간의 경험이 ‘거대하고 급속한 변혁’임에는 틀림없지 않은가. 혁명비교가 아니라 ‘big rapid change’ 비교사 학회를 한다면 한국 근대사는 주빈으로 한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근대사 서술은 지금부터다.

식민지배, 남한과 북한의 ‘change’ 평가 문제 등 난제가 많다. 한국의 정체성을 드러내주는 매력적인 근대사 내러티브가 만들어질 때에 비로소, 한국 지폐에도 좀 더 어리신(?) 분들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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