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반공주의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이승만은 자신이 하와이에서 발행하던 ‘태평양잡지’에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이라는 글을 게재했다(1923년 3월호). 당시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세워진 소련이 전 세계 피압박 민족의 희망으로 떠오르던 시기였다. 조선의 많은 독립운동가, 지식인들도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소련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공산주의 비판을 감행한 것이다. 그는 먼저 양반, 상놈 하는 신분제가 없어진 자리를 자본가-노동자 간의 빈부격차가 대신해버린 세태를 비판하며, 공산주의의 평등 주장을 일단 평가했다. 그러나 재산을 나눠 갖게 되면 소수의 부지런한 사람이 다수의 게으른 사람을 먹여 살리게 될 것이고, 자본가를 없애버리면 혁신과 진보는 중지될 것이며, 보통 사람의 학식을 높여 지식인과 대등하게 만들어야지 지식인을 아예 없애자는 것은 안 될 말이다 등의 이유를 대며 공산주의의 부당성을 갈파했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 소식을 접했을 때에는 “미국이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하면 한반도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당 간에 피를 흘리게 될지도 모른다”며 공산주의자와 소련을 경계했다(한표욱, <이승만과 한미외교>). 그의 반공주의는 철두철미하여 해방 후 정국을 주도할 때는 “공산주의자들은 콜레라와 같다”(방송연설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고 했고, 미국인들에 대해서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투쟁에 있어서는 중립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훈계(?)했다. 이 때문에 소련에 대해 온건했던 하지 미군정 사령관이나 미국 국무부와 자주 갈등을 빚었다.

그런데 이런 투철한 반공주의는 이승만만 갖고 있었던 게 아니다. 당시 일본의 정치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는 극동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남긴 유서에서 미국을 향해 “일본이 적화되지 않도록 부탁한다. 미국 지도자는 커다란 실수를 범했다. 일본이라는 적화의 방벽을 파괴했다. 지금 만주는 적화의 근거지다. 조선을 양분한 것은 동아의 화근이다”라고 썼다. 미국은 그 후 소련에 대한 협조주의를 바꿔 일본을 ‘적화의 방벽’으로 재건하는 쪽으로 선회했으니(이른바 ‘역코스’), 도조의 충고가 먹힌 것일까.

당시 일본 보수 정치가의 반공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고노에 상주문’일 것이다.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는 태평양전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다, 진주만 기습 한 달 반 전 퇴진했다. 그는 그 후 패전을 예견하고 가능하면 빨리 미국과 강화를 맺으려는 활동에 들어갔다. 1945년 2월 전세가 크게 불리해지자 히로히토 일왕을 만나 상주문을 제출했는데, 그 내용이 흥미롭다. 그는 먼저 “국체호지(일왕제 유지)의 관점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최악의 사태(패전을 의미)보다도 이에 수반해 일어날 공산혁명”이라고 단언한다. 이어 현재 전 세계가 공산혁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며, 유고의 티토 정권을 비롯해 폴란드, 불가리아, 루마니아, 핀란드 등 동유럽의 공산화 움직임을 우려했는데, 이는 이승만의 인식과 흡사하다. 심지어 프랑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서 확산되는 공산세력과 소련의 지원도 주시했다. 이어 국내로 눈을 돌려 현재 강화를 반대하고 승산 없는 전쟁을 계속하려는 군부의 일부 세력은 사실은 패전의 혼란을 노려 공산혁명을 일으키려는 속셈이라고 주장했다. 훗날 일왕 측근은 이런 특이한 주장에 히로히토도 놀란 모습이었다고 술회했다.

고노에는 미군이 체포하려 하자 음독자살했다. 도조는 권총 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쳐 재판 끝에 사형에 처해졌다. 반면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됐을 뿐 아니라 미적거리는 미국을 몰아세워 한·미 동맹을 체결했다. 그들의 운명은 판이했지만 당시 미국이나 유럽보다 더 강력했던 동아시아 보수 정치가들의 반공주의가 어떤 배경에서 나왔던 것인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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