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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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째깐한 약속 볼품없고 작은 걸 남도에선 째깐하다고 해. 홍어 거시기만 하다면서 시퍼 보고(얕잡아 보고) 대접해주지 않는 머시기. 그래도 째깐한 거시기와 머시기가 있어 세상이 알맞게 굴러가지. 제대로 말하자면 ‘있어서’가 아니라 ‘있어야’ 세상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해야겠다. 잔설 좁쌀눈이 내린 뒤에야 굵은 함박눈 떡살눈이 차곡차곡 대지를 새하얗게 덮는 것처럼 째깐한 당신의 존재가 크고 우람한 무엇까지도 존재할 수 있게 만들지. -
임의진의 시골편지 비비드라라러브 심심하던 차 촌동네에 악마가 나타났는데, 악마는 환한 서울에선 못 살고 보통 캄캄한 시골이 ‘놀라게 하며 놀기’에 따따블인 곳. ‘시골 자가에 비닐하우스 댕기는 반장 이야기’를 그대 아시는가. 뿔 달린 악마가 앞에 보여도 전혀 겁을 먹지 않더란다. “이보슈~ 내가 안 무서워?” 눈이 똥그래진 악마가 묻자 반장은 가소롭다는 듯, “헛~ 당신 누이랑 내가 수십년째 한 이불을 덮고 사는 사람이오. 무섭기는커녕 쓰럽지도 않소이다.” -
임의진의 시골편지 깨달음 공부 앞밭에서 할매가 늙은 호박을 줍고, 또 남은 깻단을 세우더라. 겨울에 불쏘시개로 쓸 모양이다. 환기 좀 시키려고 문을 활짝 열었는데 마른 깻단 냄새에 몸이 쏠렸다. 호박을 하나 얻어다가 죽 쑤어먹으려고 뒷방에 앉혔어. 겁나게 오지고 감사해라. <마가복음 전남방언> 책을 산중에 사는 스님 동생에게 한 권 보냈는데 읽고 은혜(?) 잘 받았다며 인사말. 깻단 냄새가 좋다 했더니 깨와 깨달음이 같다면서 농을 한다. 주일학교에다 여름성경학교 출신인데 인연이 달랐는지 ‘그쪽’으로 갔다. 그 친구 언젠가 했던 말을 기억해. 스님들이 주로 ‘깨달음’이 어쩌고 하지만 종정 큰스님도 ‘나는 깨달은 사람이다’ 말하지 않는대. 깨달은 사람이 무슨 ‘나’라는 에고가 있겠는가 말이다. 교회 쪽 동네엔 사이비 ‘재림 예수’가 여럿이다. 말만 목사지 신흥종교 교주 노릇을 하는 분들도 솔찬하게 보인다. ‘나에게 오라! 내 말만 들어라’라는 소리를, 아주 눈 하나 깜빡 않고 겁 없이 내뱉는다. 무슨 배짱인가 싶어. -
임의진의 시골편지 신애기 성미 급한 카페 사장님들은 11월 첫주부터 성탄 캐럴을 들려준다. 징글벨 징글벨. 새빨간 루돌프 사슴코와 빨간 트리에 달린 잘랑잘랑 방울들. 방울소리를 듣노라니 엉뚱하게도 점집에서 흔든다는 방울소리 얘기가 떠올라. 소설가 성해나의 단편 ‘혼모노’엔 신애기(신딸)의 방울소리 장면이 나온다. “그 애는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점집 골목으로 들어가버린다. 그 애가 걸음을 뗄 때마다 에코백에 달린 무령에서 잘랑잘랑, 방울소리가 난다.” 연애사 정도 물어보는 신애기야 귀여운 노릇이지만, 한동안 국가 대사 나랏일까지 점을 본 듯한 의혹들. 어이없는 나라에서 살았다. -
임의진의 시골편지 가을이 오면 이문세 형님의 노래 ‘가을이 오면’ 1소절, 그러니까 “가을이 오면 눈부신 아침 햇살에 비친 그대의 미소가 아름다워요. 눈을 감으면 싱그런 바람 가득한 그대의 맑은 숨결이 향기로와요. 길을 걸으면 불러보던 그 옛 노래는 아직도 내 마음을 설레게 하네…”까지 불렀는데 가을이 가고 있어. 아쉬워 어쩌냐~ 가는 임을 붙잡을 길이 없네. 자주 먼저 떠나보내면 이골이 나기도 한다는데… -
임의진의 시골편지 시엄씨 시어머니를 ‘시엄씨’라고도 불러.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어려운 사이지. 내 아들을 납치해간 며느리가 내게 잘하면 모르겠지만, 못하면 노여움이 생기게 마련. 살아주기만 해도 고맙다는 말은 마음을 싹 비우고 난 뒤의 소리렷다. 예전에 한 며느리가 시집살이에 고달파 교회엘 첨 갔어. 교인들이 주기도문을 외는데, 귀에 쏙 들어오는 말에 아찔 감동. “시엄씨는 들어오지 말게 하옵시고~” 허걱,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가 그렇게 귀에 들린 것. -
임의진의 시골편지 랑잠 랑잠 차를 몰고 가다가도 아는 누가 걸어가면 모른 척을 한다. 각자의 시간이 있을 것이기에. 작가들이 문우가 회의다 함시롱 각별함이 오히려 ‘거시기’해서 나는 근처에도 안 가고 지낸다. 다만 그래도 같은 동네 사는 소설가 누이랑은 둘이 ‘가끔씩’ 조직 활동을 한다. 누이와 며칠 전 오랜만에 커피를 같이 마셨는데, 내가 요새 하도 바삐 지내니깐(맨정신으로 살기 힘들어서 그런 건데) 그러다 몸 상할라 염려해 여러 가지 잔소리를 시전. 그중 하나가 독일 말. 그란 당케 저란 당케, 우짠 당케, 당케 쇤~ 독일어가 기본으로 되는 동네라서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아먹을 수 있지. “그게 뭐래요?” “으응~ 랑잠 랑잠~” 아! 라앙자아암~, 천천히 쉬엄쉬엄하라는 예쁜 독일 말. 옛날에 어디선가 주워들었는데, 잊고 살았다. 랑잠은 두 번 거듭 말해야 진정성이 느껴져. 누이는 두 번 연결해서 말했다. -
임의진의 시골편지 조용필과 꼬추잠자리 고추보다 매운 걸 꼬추라 하는가. 가왕 조용필 노래 ‘고추잠자리’는 요쪽 함평 양반 김순곤 선생이 작사한 노래다. 요 노래 말고도 ‘못찾겠다 꾀꼬리’도 있는데 가왕이 사이키델릭에 빠졌을 때 대표곡들이다. 전라도에선 세게 발음을 해서 꼬추는 있어도 고추란 없는데, ‘꼬추잠자리’가 날아 재끼는 가을볕 아래 다복한 명절들 보내셨는지. 고추 농사가 올해 어찌 되었는가 보려면 김장 담글 때 갓 빻은 고춧가루 냄새를 맡아 보면 안다. 밭에서 잘 컸는지, 볕마당에 잘 말렸는지, 곱게 빻았는지 말이다. -
임의진의 시골편지 차꾸차꾸 우리 동네선 ‘자꾸자꾸’를 ‘차꾸차꾸’라 말한다. 자꾸나 차꾸나 뭐 비스무리하다만 차꾸차꾸라 할 때 마음이 더 쓰이고 종종거리게 된다. 쓸데가 많은 말인데, 주로 생각나고 보고 싶을 때 쓰면 살갑고 따수워. “자네가 겁나게 차꾸차꾸 생각나드랑게” “자네가 차꾸차꾸 보고 싶드라고” 하면서 끈적하게 감아대는 소리. “오메 뭔 숭한 소리를 그라고 대놓고 한당가” 함시롱 싫지 않은 표정 관리. -
임의진의 시골편지 목댕기와 자유인 들리는 평양발 뉴스에 남쪽 형제들 두고 노여움이 가득해. 나는 종이접기 천재, 아랫동네 꼬마애 ‘해와’랑 놀면서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날린 일조차 괜스레 미안하고 마음이 쓰여. 찔벅찔벅 성질 건들지 말고, 다투지 않으면서 평화롭게 살았으면 좋겠구만 그래. 평양에선 넥타이를 목댕기라고 한다덩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 굵은 소금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 목줄을 끊고 달음질치는 자유로운 순례자와 예술가들을 대변하고자 함이다. 그래도 예쁜 넥타이 진열장을 보면 어울리는 어른 생각이 나기도 해. 저번엔 은퇴식을 가진 한 어른에게 넥타이 아니 평양말로 목댕기 하날 선물해 드렸다. “사모님과 경양식집 데이트하실 때 매세요잉!” -
임의진의 시골편지 누나 무스쿠리 위로 누나들이 몇 있는데, 작년 한 누나가 사고로 떠나고 나머진 나이 차이가 제법 있어 누님이라 높여 부른다. 울 누나들은 팝송 부르기를 좋아했는데, 그리스 여가수 ‘나나 무스쿠리’ 카세트테이프도 집에 굴러다니던 걸 기억해. 최근 가수 박인희 샘의 어떤 글을 보니, 그리스 사람이 경영하는 한 가게에서 들은 노랫소리가 무스쿠리 음반이었단다. 내게 파시라 하니 아끼는 음반이라 절대 팔 수 없대서 박인희 자신 노래가 담긴 테이프랑 간신히 맞바꿨대. “그녀의 노래를 들을 때는 ‘자매혼’을 느낀다. … 그리스 사람이 한국의 박인희라는 이름을 어디 들어보기나 했겠는가. 자기처럼 나나 무스쿠리를 좋아한다니까 그 간절한 마음을 보고 바꿔주었겠지.” 박인희 샘의 독백이다. -
임의진의 시골편지 나그네새 기온이 뚝 떨어지덩만 찌르르르 풀벌레 소리가 들려. 너무 다른 너, 깜짝 놀란다. 갈꽃들이 드디어 뽐내려고 채비를 한다. 너무 다른 공기, 겨울 철새들도 머잖아 찾아오겠지. 지난주 람사르 문화관이 있는 창원시 주남저수지에 벗님들과 생태탐방 겸 다녀왔다. 비치된 ‘겨울철새 생태지도’를 하나 집어 들고 왔는데, 집에 와서 찬찬히 펼쳐보니 물닭, 흰뺨검둥오리, 알락오리, 쇠기러기, 큰고니, 재두루미, 흰비오리, 뿔논병아리, 가창오리, 청둥오리, 노랑부리저어새, 흑두루미… 새들 사진과 얘기들이 잔뜩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