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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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맑은 하늘 어느 오후 니체의 <자라투스트라 어록집>에 나오는 지혜자의 노래야. “무화과 열매가 나무에서 떨어지고 있다. 그 열매의 달콤함, 그리고 향기로움이란! 그 열매가 떨어지면 붉은 껍질은 터진다. 나는 무르익은 무화과 열매처럼, 나의 가르침이 너희들에게 떨어지리라. 나의 벗이여, 그것의 즙과 그것의 향기로운 살을 먹어보아라. 맑은 하늘 어느 오후에, 그것이 우리 곁에 떨어지고 있다.” 복숭아가 잘 익어 맛나고, 무화과도 날로 굵직하게 익어가는데 태풍과 장맛비가 닥쳤다. 장마는 땅을 더럽히지만 하늘만큼은 맑게 만들지. “비가 오면 하늘이 맑아진다. 하늘이 맑아지면 땅이 더러워진다. 땅이 더러워지면 물이 탁해진다. 강물이 탁해지면 바다가 상한다. 하늘 꼭대기가 바다 바닥까지 내려간다.” 이문재 시인의 시 ‘맑은 하늘 어느 오후’는 간절한 바람이 담긴 기도문 같다. -
임의진의 시골편지 밤의 디스크쇼 허리 디스크로 아픈 중년이나 할배 할매들은 밤마다 외마디 비명을 질러. 허리는 뇌와 연결이 돼 등에 달라붙은 뇌라고 한다지. 허리가 생각을 하는지도 몰라. 허리를 구부려 짓는 농사일로 농부들은 고질병을 앓아. 마음도 병이 들지. 농부라고 쓰면 창피하다며 자식놈이 ‘곡물 팽창업’이라고 부모님 직업란에 적었다나 어쨌다나. 세월이 흘러 흘러 농촌마을은 전원주택단지로 불리고, 사는 것은 똑같은데 변경된 주소지 ‘전남광주특별시’. 특별할 것은 당최 모르겠고 밤의 디스크쇼는 이종환 아저씨가 없어도 여전히 계속돼. 밤마다 허리 디스크가 도져. -
임의진의 시골편지 안잴리나 “배통아지가 뽈록한 거시 머슬(뭣을) 허천나게 묵었는갑서” 지나가는 개를 보고 부러워 한마디. 똥개와 달리 내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번개 치듯 요란해라. 내 또래 튀어나온 배를 걱정하는 이들이 꽤 많덩만. 그래서 운동도 열심히 하고 밥도 줄이고 그러덩만. 나는 살이 찔래도 찔 체질이 아닌갑서. 밥맛이 없고, 사는 게 재미도 없어 몸무게가 더 줄었다. 밭에서, 또 마당에서 보내는 시간에 흘리는 땀 때문일까. 여친들 보면 살을 빼려고 노력들이 대단하셔. 체중계를 선물하겠다면 에구머니나 질겁해. 몰래 자주 잴 테지만, 체중은 국가 기밀이나 마찬가지. ‘뼈말라’ 수준에도 감량을 목표로 삼은 ‘안잴리나~’는 오늘도 다이어트 도전 중. 누군 자주 산에 다니고 누군 약까지 처방해 먹으면서 체중감량, 뜯어 말리고 싶어라. 젊은 친구들은 달리기도 하고 줄넘기도 백번. 또 누구는 어쩐다 저쩐다~. 의사가 무조건 체중을 빼라고 했다면서 맛난 후라이드 통닭을 마다해. 먹고 죽은 귀신은 태깔도 좋다덩만. -
임의진의 시골편지 단벌 신사 빗물이 졸졸. 단벌 신사는 축축하게 옷 버릴까 움츠려서 걷는다. “단벌 신사 우리 애인은 서른한 살 노총각님. 단벌 옷에 넥타이 두 개. 언제나 변함없죠. 멋이야 없지만 마음만은 미더워. 주머니가 텅텅 비어 데이트를 못해도 단벌 신사 노총각님 당신을 사랑해요.” 김상희씨가 1968년 부른 ‘단벌 신사’가 짠하고 구슬퍼라. 당시엔 서른한 살 청년이 노총각 소리를 들었구나. -
임의진의 시골편지 일복이 이복이 삼복이 언제고 말했지만 외국인들이 내 이름을 지 맘대로 이매진이라 부른다. 안경도 똥그랗고 존 레넌을 닮았다나. 요샌 기관에 관장 노릇을 봐주고 있어 단정하게 머리를 자르고 댕긴다. 메뚜기도 한철, 내 방랑도 소싯적 얘기다. 이매진, 성을 갈아버렸네. 한국식으로 하자면 이씨 왕조, 이성계 후예인가. 내 스승 목사님이 함경도 함흥 분이시다. 이씨 왕조가 함흥에서 생겨났대. 언젠가 국중박에서 함흥 관련 전시를 했었는데, ‘함흥차사’ 얘기도 그때 알았지. -
임의진의 시골편지 라곰 인생 충청도 아들이 아비에게 용돈을 달라고 하는 장면, 수필가 남덕현씨 부자 얘기란다. 아들: 아버지~ 아버지: 오냐. 아들: 아버지~ 아버지: 내가 니 아버지 맞다. 아들: 아버지~ 아버지: 알았다. 아들: 감사합니다. 군소리라곤 없이 짧고도 굵게 용건만 간단히.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길게 할 필요가 있나. 당신이 내 아버지란 사실을 잊지 마시라 정도로 끝. 아버지에게 용돈을 빼내는 일에 한계가 닥치면 맘 약한 엄니나 할매 차례가 된다. 할매는 주일에 교회에다 바치려 했던 꼬깃꼬깃한 지폐를 손주에게 뺏기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게 돼.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으흑.” -
임의진의 시골편지 먹방 순례자 베드로 신부님은 배들어 신부님. 자글자글 삼겹살을 굽고, 그 기름으로 김치볶음밥도 만들어 먹고, 그랬더니 아랫배가 위로 들려졌어. 그래봤자 존잘남 외모 출중이라 미울 만큼은 아냐. 만나면 항상 유익하고 긍정적인 말씀뿐. “재밌는 영상을 찾아보면 밤새는 줄 모르겠습디다. 사투리 동영상들이 제일 재밌더구만요.” 나더러 그런 일을 해보란다. 아이고~ 가만히 살랍니다잉. -
임의진의 시골편지 오랑깨 찬란한 봄날이 가기 전에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봄꽃 축제로 읍면까지 풍성해라. 오라 가라 할 때 그 오랑깨. 참깨 들깨 아니고 오랑깨. 깨를 뿌려야 한 명이라도 더 찾아오지. 그래서 ‘께’가 아니라 ‘깨’라고 ‘고소미’를 발라서 쓴다. 잔치 때마다 자리만 채워줘도 큰 힘이 되는 친구들이 있다. 또 주변에 문화기획 일을 잘 보는 재간둥이 친구가 하나 있으면 인생이 풍요로워진다. 그런 친구가 프로그램을 짜면 행사마다 뭔가 찡하고 여운이 남아. 이런 좋은 자리 마련했는데 네가 안 오면 말짱 꽝~. 오지 않으면 ‘오랑캐’ 적군 취급하겠다며 귀여운 협박도 늘어놓지. 최근 빈자리가 있을 법한 어려운 주제의 학술대회를 어느 연구소에서 개최. 잠깐 앉아 있다가 왔다. 교수님이 마이크를 쥐자 말자 머리에 쥐가 내리기 시작, 뒤지는 줄 알았어. 지식이 짧다보니 대체 뭔 소린지~ 주최 측 친구 눈도장을 서둘러 찍고 휙 나왔다. 역시 나는 국립연구소보다 국립교도소(?) 쪽인가 봐. 배운 사람들보단 못 배운 사람들끼리 어울려야 재미나고 자유로워. -
임의진의 시골편지 껌딱지 요즘은 ‘사회적 거리 두기’ ‘손절’ 같은 일이 다반사야. ‘노키즈존’은 아이들을 데려오지 말라는 말, 과하게는 아이들을 낳지 말라는 소리 같아. 이쪽에선 도채비풀이라 부르는 ‘도깨비바늘’, 풀섶을 헤치면서 걷다 돌아오면 옷에 달라붙어 집까지 따라와. 씹다 버린 껌도 구두 안창에 딱 달라붙어 헤어지기 싫어해. 싫고 귀찮은 존재를 부를 때 쓰는 말이 아니라, 꼬옥~ 달라붙어 함께 있고 싶어 하는 동무, 동지, 동행에다 붙이는 애칭이야. -
임의진의 시골편지 주먹밥 나눔 어떤 영화 탓에 ‘밥은 먹고 다니냐’는 인사말이 유행이었지. 이 동네도 보통 인사가 “진지 자셨재라” “밥은 무거부렀냐잉” 그런다. 경상도에선 “밥 잡샀는겨” 엄니가 백수 아들내미에게 밥상을 봐와선 “문디 자스가. 아나 여있다” 함시롱 코앞에 들이밀겠지. 암만 미워도 내 자슥 아이가. 광주에선 오월이면 주먹밥 잔치가 열린다. 오월 그날을 기억하면서. 나도 후배가 도시락 배달회사를 하는데 행사용으로 100인분 주먹밥 세트를 주문했어. 최고로 맛난 주먹밥을 맹글어달라 했덩만, 샐러드까지 한핀짝(곁)에 놓고 우와 멋져버려. 경상도에서 온 미술관 친구가 있는데, 분명히 “깔롱직이네” 그러겠지. 때깔이 멋지네 뭐 그런 뜻. -
임의진의 시골편지 집주인 ‘잘 집 많은 나그네가 저녁을 굶는다’는 속담이 있어. 일을 여기저기 벌여놓은 것도 모자라 내 이름 석 자로 계약을 맺어 사용하는 공간이 시내에 두 곳이나 있다. 어떻게 굴러가는지, 화장실은 깨끗하며 물은 잘 나오는지 모를 때가 있어. 집주인, 아니 집주인 양반을 잘 만나 그간 십수년째 별 탈 없이 잘 쓰고 있다. 해외에 사는 벗들 가운데 남의 집과 사무실을 빌려서 쓰기도 해. 쓰빠 씨바~(고맙습니다) 인사말조차 격한(?) 러시아에서 여행 사업을 하는 분 말을 들었는데, 집주인이 걸핏하면 찾아와 잔소리를 늘어놓고 벽에 박은 못의 숫자를 세어놓고 간대. 못이 더 늘지 않도록. 외국인 주재원에겐 재계약 때마다 수리비용을 청구한댄다. 유럽에 가봐도 외국인들은 자국민 텃세에 혀를 내두르게 돼. 나그네 신세 어디나 서럽고, 집 없는 설움은 뼛속까지 한스럽지. -
임의진의 시골편지 우야돈동 문주란의 노래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는 “밤하늘에 별도 달도 따주마 미더운 약속을 하더니…” 다음 가사는 ‘삑~ 땡~’ 안 들어도 훤한, 아니라는 소리다. 그래도 늑대들은 구애하며 미더운 약속을 남발한다. 모리 요코의 그림책을 읽었는데 <어느 별의 기차>란 책, 늑대 승객들은 보름달이 뜨자 노래가 절로 나와. “아우우, 아우우, 아우우우~” 외롭고 적적해서, 아니면 본능적으로 ‘아우우 아우우’ 노래를 부른다. 매정한 보름달은 며칠 그러다가 구름 속에 슬쩍 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