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의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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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그래잉 저래잉 담 넝쿨 하얀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학교 댕겨올 아이들도 없는데 종일 골목에서 피어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러고 보니 다른 학교가 있긴 해. 노인대학이라던다. 이런 우스개 얘길 들었지. 노인대학에서 ‘영어회화 기초반’에 입학한 할배가 집에 돌아와 할멈을 콕 찌르며 저녁 인사 “우리 할멈~ 꾹 이쁘닝.” 그러니까 할매가 “먼 주책이요잉. 쭈글탱이가 머가 이쁘다고 놀리요잉잉~” 등짝 스매싱. 아침에 할배가 일어나서 “국 모닝~” 아침 인사. 할매 왈 “국이 머냐고라? 된장국이재 머여. 생일도 아닌디 미역국 끓이까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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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고양이 스님 가끔 산책하러 가는 산길, 절집 외곽에 스님이 돌보는 고양이가 한 마리 살고 있다. 고양이는 경계를 잔뜩 하고서 길손인 나를 쳐다보곤 하는데, 요즘은 다가가도 ‘하악질’을 하지 않는다. 인기 드라마의 ‘학씨’처럼 ‘하악질’ 한번 해보지 못할, 만만한 상대란 걸 고양이도 안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 <상상력 사전>에 보니, 이 말이 맞나 틀리나 모르겠지만, “한국에 고양이가 처음 들어온 것은 중국에서 불교가 전래될 때의 일이다. 경전을 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양이를 함께 들여왔다고 한다”. 절에 사는 쥐와 절에 사는 고양이의 전쟁을 상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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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엄마 없는 하늘 아래 대지에 가득 내린 초록과 함께 이른 초여름 기운까지 가득해.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곧 어린이날, 이어지는 어버이날. 어린이를 떼고 어버이가 되었는데, 그사이 어버이를 잃고 말았네. 부모 잃은 사람들은 카네이션꽃만 봐도 슬픔과 아쉬움에 젖게 돼. 고아 신세, 차라리 어버이날이 없다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흑흑. 트로트 세계에 최진희의 ‘저음 꺾기’는 누가 있어 이를 능가할까. 집에 있는 ‘최진희 골든 15’ 음반을 꺼낼 때는 엄마 생각이 간절할 때야. “마음 하나 편할 때는 가끔씩은 잊었다가 괴롭고 서러울 때 생각나는 어머님. 지난여름 개울가에서 어머님을 등에 업고 징검다리 건널 때 너무나도 가벼워서 서러웠던 내 마음 아직도 나는나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젖줄 따라 자란 키는 당신보다 크지만 지금도 내 마음엔 그 팔베개 그립니다. 내 팔베개 의지하신 야윈 얼굴에 야속하게 흘러버린 그 세월이 무정해 어머님이 아실까 봐 소리없이 울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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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번아웃 영적 지도자 프랭크 바이올라는 <흔치 않은 지혜>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한다. “유명세를 멀리하라. 빈집에 들어가지 마라. 기대치를 낮추라. 계절을 분별하라. 늪지가 아닌 수로가 되라. 기회를 놓치지 말고 곧바로 사과하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라. 허세를 부리지 마라. 유해한 사람을 피하라. 시련을 낭비하지 마라. 소진(번아웃)을 피하라.” 요즘 보면 녹초가 된, 소진된 사람들이 많아 보여. 태우고 나면 남는 건 한 줌 재와 공허함뿐. 그러니 전부 다 불태우지 말고 적당히 체력을 남겨두고, 쉴 만한 물가와 휴일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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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인생은 지금부터! 서태지가 독립한 때도 아니고, 더 앞서 ‘시나위’라는 밴드 할 때 얘기니까 구석기 시대쯤 요런 말이 있었다. “부자는 골프 회원권을 사고 나는 버스 회수권을 사고, 부자는 호텔 사우나에 가고 나는 중동 사우디에 일하러 가고, 부자는 아침마다 헬스장에 가고 나는 아침마다 핼쑥해지고…” 그때나 지금이나 양극화는 여전하고, 아니 요샌 그냥 양국화. 두 개의 나라로 쪼개진 거 같아라. 한쪽은 수가 많은데 만날 쪼들리고 주눅이 들어 있어. 다른 한쪽은 수가 적은데도 왈패답게 으스대고 떵떵거려. 도대체 세상 두려운 게 없어. 최후의 보루 법복 입은 이들마저도 조물딱조물딱 아니 쪼물딱쪼물딱, 잡혀 사는지 아니면 똑같은 건지. ‘가진 자, 있는 자’에게만 특혜를 주고 그러는 걸 보면 기가 막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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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고양이 나라 재작년인가 ‘이매진도서관’ 식구들이 시사만화가 박순찬 화백을 한번 뵙고 싶다고 요청. 이전에 사석에서 인연도 있어 강연회에 모셨다. 고양이 캐릭터 ‘냥도리’가 등장하는 만화를 화면 가득 보면서 정치 풍자의 해학을 즐겼다. 강연 후엔 백지에 냥도리 사인도 나눔했지. 나도 한 장 받았는데 어디 뒀더라? 자취 집 데이트 신청이 과거엔 “라면 먹고 갈래?”였는데 요샌 “고양이 보고 갈래?”로 바뀌었단다. 애묘인들이 상당히 많아졌다. 고양이가 대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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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도댓불 옛날 뱃사람들은 바다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고 별자리를 익혔어. 모터를 단 통통배도 아니고, 돛에 한가득 바람을 받았지. 별자리를 따라서 물길을 저어가던 돛단배. 행운이 따르지 않으면 폭풍우에 휘말려 물고기 밥이 되고 말아. 제주말로 등댓불을 ‘도댓불’이라 하는데, 현무암을 쌓아 올린 도댓불 언덕에 불빛이 깜박깜박, 사랑하는 이의 무사 귀환을 반기는 한 점 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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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다디단 양배추 매화 벚꽃 피니 유채꽃 제주 앞바당 찰싹대는 파도는 어떠한지 궁금해. 제주 친구는 서둘러 빨리빨리 오랄 때 ‘재개재개 옵서’, 느리게 오랄 때는 ‘놀멍놀멍 옵서’ 그런다. 빨리든 느리게든 가면 되는 일인데, 연분홍 꽃잎들, 샛노란 꽃잎들 다 지고 나면 무엇하리. 나비들 날고 양배추밭에도 ‘봄이 왔네 봄이 와’ 기지개 켜는 산밭의 아지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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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공기는 좋잖여 <학생댁 유씨씨>란 김종광의 소설엔 ‘웃픈’ 얘기가 솔솔. 이른 나이에 임신을 하는 통에 시골로 도피한 어린 신부 학생댁이 주인공이다. 막상 정착한 동네는 생각보다 조용하지 않고, 도회지만큼 시끄러우며 온갖 간섭과 참견, 어쩌나 보자~ 하면서 팔짱 끼고 쳐다보는 눈총들. 학생댁이 괴로움에 불평을 늘어놓자 남편이 멋쩍어하면서 내뱉는 말. “그래도 공기는 좋잖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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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약한 마음 춘삼월에 드문 싸래기눈이 내리던 도쿄에 좀 있다가 왔다. 영상에 담아야 할 게 있어 하루는 지브리의 숲 미타카 골목에 있는 동경신학대 졸업식엘 물어물어 갔는데, 백년 전 대선배가 현해탄을 건너가 입학한 청산학원 신학교의 후신. 감리교 선교사가 세운 청산학원은, 시방은 ‘있는 사람’만 다니는 고급 사립학교가 되어 버렸고, 신학교는 시부야를 떠나 변두리에서 통폐합되었다. 일본말이라면 ‘구다사이’나 중얼대는 수준이라 찬송가는 허밍으로 흠흠 따라 불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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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탁구대 건너편 어릴 때 교회에 탁구대가 있었다. 동네 형들에게 배운 건 탁구보다 욕이나 부잡스러운 장난들이었지만 “탁구공 있냐잉. 그거 조깐 줘보그라잉.” 갓 낳은 계란이 오지듯 탁구공을 쥐게 된 형들이 나를 ‘있는 자’ 취급을 해주어 좋았었다. 똑같은 촌구석에 뒹구는데 ‘저소득층 아이들’과 ‘고소득층 자제들’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뭐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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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희랍어 시간 소설가 한강의 <희랍어 시간>은 희랍어를 배우는 사람 이야기다. 나도 신학교에서 희랍어 그러니까 그리스어를 쬐끔 배웠지. 처음 배울 적엔 그리스어로 시를 쓰고 싶었으나 꿈만 창대했다. 지난해 순례단과 함께 그리스 정교회의 ‘교종’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를 이스탄불에서 뵙기도 했다. 영접실에 갔더니 초콜릿과 함께 그리스인들이 즐기는 식전주 ‘우조’를 내어주어 한 잔 쭉. 모르고 마신 성직자들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어. 술이야 항상 끊었다고 말하는데, 끊은 기념으로 한 잔은 즐겁다. 강제로 금주해야 할 ‘가막소’의 내란 장군들과 우두머리는 상당히 괴로울 테지만. 암튼 그날 정교회 미사는 평소보다 짧았는데도 3시간. 고대 그리스어 찬트가 시종 이어지고, 수십번 앉았다 섰다 운동도 되덩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