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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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입학식 한번은 젊은 학승 임제가 대우란 법명을 지닌 큰스님께 찾아가 난해한 질문들을 쏟았대. 아무 대꾸도 없던 큰스님이 아침에서야 이르길 “노승이 산중 초막에 살며 적적한 마음에 하룻밤 쉬다 가라 했을 뿐. 간밤에 내 앞에서 부끄럼도 모르고 냄새나는 방귀를 그리 뀌어댔더란 말이냐. 요런 고얀 놈~” 하면서 방망이를 번쩍 들어 내리칠 기세. 둘은 이후에도 두어 번 설전을 벌였는데, 마침내 큰스님이 임제를 제자로 받아들였대. “내가 혼자 초막에 살며 인생을 헛되이 보내려다 뜻밖에 오늘 한 아들을 얻었도다.” 임제는 이후 십여년 큰스님을 시봉하면서 득도했다지. 제자가 되려고 기를 쓴 임제 선사의 노력. 좋은 스승을 만나면 꽉 붙잡아야 해. 절대 놓치지 말아야지. 몰라보고 물러서면 저만 손해야. -
임의진의 시골편지 머리에 흰눈 전인권 아저씨 노래 ‘머리에 꽃을’, 한참 불렀던 히피 스타일의 청춘이 있었지. 이제 나와 당신 머리카락을 보니 흰눈이 설설 내리고 있구나. 주룩주룩 봄비에도 녹지 않는 당신의 흰머리칼 흰눈. 이렇게 쓰다 보니 일본의 정형시 가운데 하나인 ‘센류(川柳)’가 생각나. 그 나라 할머니 할아버지 시인들의 센류는 재밌고 또 서글프더라. “연명치료 필요 없다 써놓고 매일 병원 다닌다” “만보기 숫자 절반 이상이 물건 찾기” “비밀번호 카드가 많아져서 뒷면에 적는다” “눈에는 모기를, 귀에는 매미를 기르고 있다” “쓰는 돈이 술값에서 약값으로 바뀌고 있다” “이봐 할멈. 입고 있는 팬티 내 것일세” “아내는 여행, 나는 입원, 고양이는 호텔” “일어섰는데 용건을 까먹어 우두커니 그 자리에.” “홀딱 반했던 보조개도 지금은 주름 속.” “손자 증손자 이름 헷갈려 전부 부른다”…. -
임의진의 시골편지 야르부니 한 번은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아미시 마을에 갔어. 아미시는 종교개혁시기 반체제 운동의 한줄기인 재세례파 운동으로 오늘까지도 명맥을 잇고 있지. 일부는 기계에 쏠린 문명을 거부하고 이른바 미국판 ‘나는 자연인이다’ 집단을 이루며 살아. 아미시를 찾아가는 도로는 아스팔트 길이었는데, 대관절 마차가 심심치 않게 보였어. 마차는 흙먼지를 날리며 달려야 제격인데 말이야.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흰 수염을 너풀대는 마부가 ‘이랴 이랴~’ 마차를 몰고 지나가덩만. -
임의진의 시골편지 심야방송 신승훈의 노래 ‘라디오를 켜봐요’를 라디오에서 덜컥 듣게 되면 앗, 신기해라. “지금 라디오를 켜봐요.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노래가 그대를 향해 울리는 내 사랑 대신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아나요. 1분이 아쉬웠었던 그대와 내가 함께했던 날들이…” 옛날 길거리 벽에 붙어 있던 간첩신고 벽보. 밤에 이불을 옴팍 뒤집어쓰고 라디오를 듣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 간첩이라는 설. 밤새 사랑에 눈물 흘리는 간첩도 있었더란 말이냐. -
임의진의 시골편지 기억이라는 장소 콧바람 쐬러 한양에 댕겨왔는데 그새 강력한 한파로 집이 땡 얼었네. 방심하고 모터기를 감쌌던 온열기 전원을 껐다가 낭패를 본 셈. 알려진 바 영험한 목사라고도 하덩만 신내림은 고사하고 물내림도 못하게 생겼네. 수세식 변기가 얼어 물이 안 내려가. 그렇담 비상용 바깥채 푸세식이 있지. 생태변소 이름이 거창하게도 ‘수양각’. 고드름이 언 한데에서 엉덩이를 깐 채 쪼그리고 있노라면 전신이 오돌돌, 수양은커녕 볼일도 못 보게 된다. -
임의진의 시골편지 전기장판 너무 추워 패딩을 걸치고 돌아댕기는데 동네 할매가 전기장판을 대문 밖에 내다 놓으셔. “어디가 고장나부렀나요?” “아니 불이 나부렀당게라. 송장 치를 뻔 봐부렀소잉.” 수십 년도 더 된 장판이 과열됐나 봐. 여태 뜨신 아랫목 노릇을 하느라 고생이 참 많았겠다. 여긴 도시가스도 안 들어오고, 기름보일러 아낄 참 조금만 날 풀려도 달랑 전기장판만 쓰는데, 에고~ 불이 나야 바꾸시네. 뵌 친한 목사 형님이 전기장판 아니 전기방석에 오래 앉았다가 고문을 당한 듯 불그레 저온화상을 입었당마~. 또다시 에고~. -
임의진의 시골편지 걍 냅둬유 무서운 한파가 닥칠 거래서 지붕에 올라가 연통을 속으로 박박 긁어 청소하고, 장작개비를 거실 구석에 바삐 들였다. 구워 먹을 고구마도 쟁여뒀고, 나이를 거꾸로 먹고도 싶어 떡국 봉다리도 샀지. 기막힌 눈구경을 원없이 했으면 바라. 일기예보 가지고도 나는 이리 호들갑을 떠는데, 솔숲은 또 대숲은 꿩이나 힝힝 울고 무심하게 자울댈 뿐이야. 성근 바람에 마른 건초가 살짝 뒤척이는 게 고작이다. 이 숲은 마치 충청도 사람들처럼 무심하고 태평해. 여름날 충청도 어디서 수박을 파는 장꾼의 대화. “저기요 이 수박 어떻게 파세요?” “고 가생이 수박 말여유? 팔겄쥬. 안 팔 거믄 멀라 놔둬꺼슈.” “잘 익은 거겠죠?” “지대루 익었겄쥬. 안 익었음 수박 탓이지 내 탓이거슈?” “달겠지요? 안 달면 어떡해요.” “그람 달겄쥬. 안 달어두 수박 맛은 나겄쥬 뭐.” “만원만 깎아주세요.” “걍 냅둬유. 개나 줘불쥬 뭐.” -
임의진의 시골편지 왜 불러 완벽한 사람이란 세상에 없어. 이를 전제로 깔고 사람을 만나야 해. 지나친 기대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고이 접어두길 바라.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부족함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다 허술하고 어리석은 부분이 있기 마련이야. 작년에 중국 허난성엘 갔을 때 배운 글귀가 있다. 시골집마다 벽에 붙어 있던 액자. 유독 중국 인민들이 좋아하는 격언이란다. -
임의진의 시골편지 인사성 뒷산 참나무 한 그루가 바람에 쓰러져서 밑동은 산지기 아저씨가 가져가고, 나머지 곁가지는 내 차지다. 엔진 톱으로 잘라 틈틈이 쟁이고 있다. 겨울엔 장작불 땔감을 하는 일이 나로선 큰 과업이야. 손수레로 옮기면서 어르신들 길에 보이면 새해 인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산길을 비척비척 다니시는데 이곳에서 수십년을 보았으니 지금보다 젊은 시절도 기억하지. 양옥집 짓고 이사들 온 젊은 축들은 인사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 아파트에 살던 방식대로 산다. 애들조차 인사를 않는 경우도 있덩만. 새들도 바람도, 고라니도 인사를 하면서 다니는데… -
임의진의 시골편지 배추밭 “아끼지 않은 말은 시가 아니다. 입 다물어야 속 차오르는 배추밭을 지나며…” 김용만 시인 신작 시집 시의 한 소절. 칼럼을 쓰는 시방, 창문 건너편에 보이는 배추밭. 김장철에도 살아남은 배추 포기들이 밭에 천불전처럼 좌정해 있다. 눈 내리면 배추밭이 아니라 눈밭, 얼고 녹고 해가며 단물 쭉쭉 오르겠다. 요샌 말이야 방방 시끄럽고 소란한 데 오래 앉아 있질 못하겠어. 입 다문 배추밭이 부럽고 그리워. 좋은 소문보다 나쁜 소문, 뜬소문, 가짜뉴스 발원지. 누구 좋단 소리보다 흉보는 게 또 가장 재밌다지? ‘아무말 대잔치’에 뛰어든 앵무새들이 누리소통망엔 정말 징하게도 많덩만. 사생활 보호에 취약한 유명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조차 해. -
임의진의 시골편지 따스했던 기억들 휘뚜루마뚜루 뭐든 척척박사다만 못하는 게 한 가지 있어. ‘거절’을 잘 못해 끌려다녀. 하늘 뜻이 분명히 있겠지 끄덕이면서 견뎌낸다. 이를테면 뭔가 엮인 듯한 나쁜 조건, 불이익과 손해. 마음을 조금 수습하고 나면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나 차츰 깨닫게 되더라. 묘하게 따스한 기억을 건네는 만남이 기다리더라. 이 추운 밤, 선물을 배달하는 ‘산타 영감탱이’. 먹여 살릴 가솔들, 토깽이 손주들이 주르르 있고, 하다못해 루돌프 사슴들 사료값이라도 벌어야 해. 육지 도로도 모자라 하늘까지 박차고 오를라면 잘 먹여야 쓴다. 국경을 넘나드니 선물마다 관세도 세게 붙어. 남는 장사가 아닌 게야. 굴뚝 타다 떨어지면 꼬리뼈가 아작~ 난도가 높은 업종이다 보니 젊은이들 구직도 안 해. 성탄 전야 하루만 일하는 것도 아냐. 일년 내내 착한 아이 나쁜 아이 가려서 생활기록표 작성. 복지가 좋지도 않아. 빨간 제복 단 한 벌. 무거운 선물 짐보따리에 허리가 망가져도 파스 한 장뿐. 그래도 꼬마들이 선물을 받고 좋아라 뜀뛰면 그게 참말로 좋아. 산타 영감 가슴에 남는 건 따스했던 이 기억뿐. -
임의진의 시골편지 라라의 테마 붕어빵과 잉어빵 한 봉지, 휴게소의 호두과자, 여기다 극장 팝콘 세트까지 생각나는 심심하고 근질근질한 날이다. 마당에 나가보니 밤새 산 중턱까지 흰 눈이 쌓였구나. 바깥나들이가 재밌겠다. 마침 누가 극장 나들이 초대를 하는데, 영화나 한 편 보러 갈까. 영화는 좋지만 뒤풀이를 생각하니 골치 아프다. 나이가 들어선가 밤마실이 성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