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 시인
[임의진의 시골편지]철부지

목사 시절을 돌아보면 ‘완죤’ 철부지 시절. 한번은 할매 집사님이 호박 구덩이 좀 파달래서 알았소잉 했는데, 좀이 아니라 엄청 많이 파라는 지시. 이걸 다 수확해서 뭐 할 거냐 했더니 호박죽 쑤어 교인들이랑 나눠 먹자고. 욕심이 많은 분이라서 한 덩어리나 주시면 생큐지. “그만 팝시다. 아따메 쓰트레스 쌓이요잉” “목사님! 시방 수가 틀리다고라우? ‘수 틀리믄’ 수를 바꿔야재. 거쪽으로 말고 요쪽으로 파시요잉.” 집에서 책이나 읽고픈 사람을 불러다가 잘 부려먹고, 할매는 간만에 눈물 대신 미소를 짓더니 밭도랑을 춤추며 내려갔다.

당시 종종 흥얼거렸던 노래 ‘모모’엔 ‘날아가는 니스의 새들을 꿈꾸는 환상가 모모’가 나오는데, 현실은 ‘말라비틀어진 눈물자국’ 할매들과 마주한 삶이었다. 노래 ‘모모’는 전일방송 대학가요제에서 상도 탔지. 원곡 가사는 “모모는 쓰레기, 모모는 위조지폐, 모모는 말라비틀어진 눈물자국이다.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사는 이어령 샘이 출판사 주간으로 있을 때 <자기 앞의 생>이란 번역 책의 뒷날개 홍보 문구였단다. 표절이다 뭐다 따지지 않던 시절. 그러니까 일부 원작자는 이어령 샘. 이를 작사가가 베낀 것.

주식 하는 친구가 스트레스에 죽을 거 같다고 그래. ‘무주식이 상팔자!’라는 격언을 알려주고 싶었으나 나는 새마을 데이트(돈 안 들이고 걷기만 하는 데이트)나 하고, 얻어먹는 주제라 할 말은 아니길래 입을 꾹 다물었다. 호박 구덩이를 파던 철부지 시절을 얘기해줬더니 킥킥대고 웃는다. 간만에 웃는다니 다행이야. ‘쓰레기’다, ‘위조지폐 공수표’다 서로들 헐뜯던 선거도 끝나고, 이제는 호박 구덩이를 파고, 참외 땅콩도 심고 농사를 지어야 할 때. 모모를 부르면서 삽을 씻던 나는 살아 있지만, 미소를 짓고 춤추던 할매는 하늘나라에 갔다. 철부지는 아직도 철이 덜 들어 이승의 삶에서 학생이다. 사실 사랑밖엔 더 배울 게 없는 인생이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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