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불변의 법칙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더 이상 책과 음반을 쌓아둘 공간이 없어 방을 대폭 구조조정했다. 최대한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구석구석 쌓여있는 온갖 짐들을 다 치웠다. 책상 서랍을 뒤지다 한 무더기의 녹음 테이프를 발견했다. 일련의 제목이 적혀 있었다. ‘Metal N’ Pop. 흠과 먼지 투성이인 케이스, 빛 바랜 잉크로 쓰인 글씨들. 그런 테이프가 한 100개쯤 서랍장 속에 빼곡히 들어 있었다. 라디오와 함께 보내던 10대 때 기록이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중학교 입학과 함께 어머니는 선물을 해주셨다. 삼성 마이마이 카세트. 음악의 바다에 빠지기 전이었던지라, 변변한 테이프 하나 없었다. 조지 마이클의 ‘Faith’와 ‘Nothing Gonna Change My Love For You’가 담겨있는 글렌 메데이로스의 앨범이 내 라이브러리의 전부였다. 따라서 들을 건 방송뿐이었다.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별이 빛나는 밤에> <0시의 데이트> 같은 프로그램을 들으며 잠이 들었다. 엽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DJ의 침 쩝쩝거리는 소리, 요즘으로 치면 그만한 ASMR(자율 감각 쾌락 반응)이 없었다. 그런게 왜 그리 감미로웠는지 모른다.

우연히 <전영혁의 음악세계>에서 뉴 트롤스의 ‘Adagio’를 알게 된 후 나는 음악세계로 가는 편도티켓을 끊었다. 늘 새로운 음악을 찾아 헤맸다. 집에 있을 때면 하루 종일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 팝만 틀어주면 어떤 프로든지 상관없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때는 가요보다는 팝의 비중이 훨씬 높던 때였다. 좋은 음악이 나오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고는 뛰어가서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한 곡 한 곡을 모아 60분짜리 테이프가 꽉 차면 ‘Metal N’ Pop이라는 이름을 라벨에 썼다. 장르 따위 가릴 틈도 없었다. 알지도 못했다. 브라이언 애덤스의 ‘Heaven’부터 밥 말리의 ‘No Woman No Cry’, 건스 앤 로지스의 ‘Patience’와 U2의 ‘With Or Without You’가 한 테이프에서 나란히, 사이좋게 살게 됐다. 그러다가 정품 테이프와 LP로 넘어가고 CD를 사기 시작하면서 그 테이프는 더 이상 안 듣게 됐다. 그런 시리즈를 만들어놨는지도 잊고 있었다.

창고를 뒤져 테이프 데크를 꺼냈다. ‘Metal N’ Pop 시리즈 4탄을 집어 넣었다. 딥 퍼플의 ‘April’로 시작해서 자이언트의 ‘I’m A Believer’로 끝나는 테이프다. 자이언트를 포함해서 ‘이런 팀도 있었군!’이란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추억의 이름들도 있다. 대부분의 곡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시작과 끝이 불분명하다. 김광한과 김기덕의 목소리가 섞여 들어가고 해태 브라보콘과 뱅뱅 CM송이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흐른다. 시작하고 좀 지나서야 녹음된 곡들은 내가 라디오에서 나오는 걸 확인하고 달려가서 녹음 버튼을 눌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수고를 거쳐 10곡에서 12곡 정도를 녹음하기까지 적어도 일주일은 걸렸던 것 같다. 30년쯤 된 ‘유물’을 발견하면서 그때의 기억들도 함께 딸려 왔다.

훗날 음반의 시대가 끝난 후, 엄청나게 많은 파일을 다운받았다. 남아 있는 파일이 없다. 하드디스크가 날아갈 때마다 파일도 날아갔으니. 물성이 없기 때문이었을까. 미련도 없었다. 20년 전 잃어버린 음반 한 장이 지금도 생각나는 것과는 다르다. 처음부터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던 세대는 훗날 음악을 담는 매체에 대해 어떤 기억을 하게 될까. 당연히 없을 것이다. 대신 음악을 만들거나 부른 사람에 대한 애착이 더 짙어질 것이다. 음악산업에서 강력한 팬덤의 힘이 더욱 중요해지는 이유이며, 2000년대 중반 이후 아이돌로 산업 재편을 끝낸 한국 음악계가 K팝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음악 시장에서 영향력을 획득하게 된 힘 중 하나다. 인간의 애정은 종종 소유욕으로 발전하기 마련이며 이 욕망을 극대화한 음악의 영역이 아이돌산업이기 때문이다. 음악을 소유하기 위한 집착이 만들어낸 추억이 팬덤이라는 소속감과 집착으로 전이된 시대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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