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선화
한신대 교수
최신기사
-
공감 친절과 미소 뒤에 있는 것들 <히든 피겨스>는 흑인 차별이 극심하던 1960년대 초반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 입사하여, 수많은 난관을 이겨내고 최고의 수학자로 인정받게 된 여성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분노 유발 차별 장면들 중에서도 가장 어이없고 가슴 아팠던 것은, 사무실에서 800m나 떨어진 흑인여성 전용 화장실을 오가기 위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질주하는 모습이었다. 이토록 열악한 환경을 꿈에도 모르는 백인 남성 상사는 업무시간 중에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운다며 질책을 하고, 설움에 북받친 주인공이 결국 울분을 터뜨리며 항변한다. 충격을 받은 상사가 건물 내의 ‘백인전용’이라 쓰인 화장실 표지판을 깨부수는 장면은 10년 체증이 해소되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
공감 유서 깊은 나라의 천박한 정치 사주에 역마살이 들었나 싶었다. 어린 시절엔 군인 아버지 따라 전국을 떠돌더니, 직장에 들어가서도 대도시는 물론 웬만한 군단위 지역까지 출장을 다니며 잦은 여관살이를 했다. 서울과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지역발전 격차를 체감한 시간이었다. 다양한 나라의 사회와 역사, 문화에 관심이 많다보니 배낭여행도 이른 나이에 시작했다. 바쁜 생활 중에도 꽤 많은 나라와 도시를 다녔고, 해외출장이나 파견연수도 세상 보는 눈을 넓혀주었다. 야간열차나 밤버스로 장시간을 이동해야 하는 광활한 국가들은 도착하는 곳마다 전혀 다른 기후와 풍광으로 피로를 잊게 만들었다. 문명과 종교의 교류, 왕조의 흥망성쇠가 활발했던 곳들은 수도만이 아니라 지방 도시들도 이국적인 매력의 거리와 유적, 예술품들이 넘쳐났다. 마을도 사람과 같아서,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은 자신만의 개성과 스토리가 풍부하고 자부심도 강하다.
-
공감 “안 돼”와 “하지 마”를 회피하는 부모들 초등학교 4학년 때 잠시 틱증상을 겪었다. 물건을 만질 때, 예를 들어 전기 스위치를 켜거나 끌 때도 반드시 세 번을 두드려야 마음이 놓였다. 스스로도 이상 증세를 감지했지만 원인은 성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엄마는 늘 학기 초가 아닌 종강날 학교를 찾아가 답례 인사를 하셨는데 담임은 원하는 게 많은 사람이었다. 욕구불만에 찬 교사의 교묘한 차별과 냉기가 아이에겐 불안감의 원천이 됐던 것 같다. 얼마 전 유사한 방송 사연을 듣다가 그 시절 이야기가 나왔는데, 학부모들 사이에 소문난 사람이어서 엄마도 알고 계셨다고 한다. “발달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나이에 그런 일을 겪어 더 자신감 있게 성장하지 못한 것 같다”는 나의 반농담 반진담 하소연에 엄마는 태연한 척 답하셨다. “그런 위축된 경험도 있어서 이만큼이나마 사람이 된 거 아니겠니?” 어이없지만 웃음이 나왔다. 겪지 않는 게 좋았을 일이고, 그 일이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 해악이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무한한 인과로 형성된 한 사람의 인생을 몇 가지 특정 원인으로 귀결시키는 것은 때로 불필요한 자기 연민이나 영웅화의 오류를 가져올 뿐이다.
-
공감 무도한 세상 속 무해한 세계의 상상 “가장 든든한 노후대책은 결혼 안 한 딸”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그런 것 같다. 내 주위를 둘러봐도 미혼의 친구들이 노부모의 삶에 실제적인 도움과 활력을 주는 경우가 많고, 대부분 딸들이다. 아들이 부모님을 모시던 시대에도 사실상 며느리들의 일이었던 것을 보면, 돌봄 노동은 사회가 어떻게 변화하건 여성과 약자들의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노동에서 자유로운 이들 또는 남성들이 부럽다거나 억울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살아갈수록 가사·돌봄 노동의 중요성과 가치를 크게 인식하게 되었기에 의무교육이나 군대처럼 모든 사회 구성원의 필수과정이 되는 세상을 상상해 보는 중이다. 어떤 존재도 예외가 없는 생로병사를 온몸으로 체화하며 깨닫는 인생 이해능력이야말로 핵가족, 노령화, 디지털 시대의 기본 역량이 되어야 할 것 같아서다. 아이·노인·환자 등 취약하거나 소외된 존재의 신체와 정서, 생활을 접하고 보살피는 경험. 느린 발걸음과 어눌한 말투와 서툰 행위들에 눈 맞추고 발 맞춰 보는 노력. 생사의 경계가 흐릿한 공간. 초췌한 안색으로 잠 못 드는 이들의 분뇨 수발을 드는 노동 속에서, 우아함이라는 허상과 등수나 지위 따위 비루한 욕망의 덧없음과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통찰하게 되는 것보다 중요한 배움이 있을까 싶어서다.
-
공감 금쪽이 부모는 ‘미친개’의 제자다 작년에 동생 가족이 휴가로 귀국했을 때 마침 선거 중이었다. 재산 축소신고로 지탄받던 후보에 대한 뉴스를 지켜보던 아홉 살 조카가 “저 후보자가 나쁜 사람이에요?”라고 물었다. 잠깐 고민하다가 “국민에게 거짓말을 한 행동이 나쁘지. 고모는 정직한 후보를 선택하려고 해”라고 답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구분 이전에 좋은 행위와 나쁜 행위를 먼저 알려주는 것이 옳을 것 같아서였다. 세상 경험이 쌓일수록 알게 된다. 대개의 사람들은 완벽하게 좋거나 나쁘기보다는 상황과 입장, 욕망에 따라 다른 행위를 선택한다는 것. 그러나 보편적 선악의 행위와 상호 영향력, 연쇄적 파급효과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고민할수록 더 나은 선택을 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는 기본적인 인간관계의 룰과 예의를 배우는 과정보다는, 타인을 속성으로 규정하고 구분짓는 법을 먼저 습득하게 만드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
공감 예민함에 대한 오해와 이해 여러 커뮤니티에서 ‘예민함 테스트’가 화제다. 생각보다 예민하게 나왔다거나 둔감하게 나왔다거나, 우울·불안증 항목에 가까워 보인다거나 하며 수다꽃을 피운다. 정확성과 상관없이 성격테스트는 늘 관심의 대상이라 유행처럼 돌고돈다. 무수한 성격표현 단어들이 그렇듯이 ‘예민함’의 의미도 간단치는 않다. 각자의 기준에 따라 상대적일 수 있고, 정상 범주라면 모든 일에 예민하거나 둔감할 수도 없다. 사람은 누구나 힘들고 불안할 때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에 민감하고 까다로워진다. 평소와 달리 과민해진 모습을 느낀다면, 비난이나 자책 이전에 상황과 이유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심리학자들은 “특정 분야의 예민성은 재능과 관련이 있다”고도 이야기한다. 청각에 민감해야 음악을 할 수 있고, 미각에 까다로워야 요리사가 되고, 소외된 음지의 사람살이까지 통찰해야 좋은 정치가나 리더가 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
공감 자랑하지 않아도 충분한 것들 자랑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인정욕구의 발현이다. 과하면 흉하지만 적당한 수준의 ‘상호인정 품앗이’는 사회적 윤활유로 기능하는데, 굳이 안 해도 되는 자랑이 있다면 운동과 독서가 아닐까 싶다. 과시하지 않아도 전달되고, 때론 타인이 더 정확하게 노력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라서다. 어떠한 성분과 품질의 식재료를 섭취하고 얼마나 운동을 했는지 자랑하지 않아도 혈색이나 신체의 상태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몸 관리를 해 본 사람이라면 더욱 잘 파악할 것이다. 몸은 몹시도 정직해서 단 1g도 이유 없이 증감하지 않으며, 물만 먹고 찌는 살이나 운 좋게 생기는 근육 같은 것은 없다. 독서도 비슷하다. 과시하지 않아도 언어와 태도를 보면 알 수 있고, 지식과 통찰력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잘 파악할 것이다. 정신도 몸만큼 정직해서 꾸준한 학습과 자기성찰의 노력 없이는 성장과 성숙에 한계가 있고 도태되기도 쉽다.
-
공감 춘향이가 흑인이라고? “뭐라고? 춘향이 역할을 흑인 배우가 맡는다고? 그런데 이몽룡은 한국인이 하고?” 한국의 전통설화로 사랑받아 온 춘향전이 영화로 만들어지는데 주연 배우가 다른 인종이라면 어떤 기분일까.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심청이의 연기를 금발의 도자기 인형 같은 러시아 배우가 맡는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한국인이라면 어색한 기분이 들 것 같다. 24일 개봉하는 디즈니의 실사영화 <인어공주>. 그 주인공에 캐스팅된 흑인 배우에 대한 논란이 그러했다. 어린 시절 선망하던 동화 속 주인공이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어떤 이들에겐 분명 “흑인 춘향이나 백인 심청”만큼 충격일 것이라 반발도 이해가 간다. 반면 디즈니의 결단을 옹호하는 이들도 많다. 바다를 자유롭게 오가는 인어인데 피부색이 왜 중요하냐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이번 작품은 안데르센이 살던 북해 주변의 음산한 바다가 아닌 화사한 카리브해 배경이라 유색인이 자연스럽다는 의견도 있다.
-
공감 할머니가 전 재산을 임영웅에게 주신대 “할머니가 전 재산을 임영웅에게 주고 싶어 하신다”는 인터넷 커뮤니티 글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나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세계적인 인지도는 비교불가지만 실제 수입은 BTS를 능가한다거나, A급 예능인들의 행사 출연료를 뛰어넘어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천상계라는 소문들이 나도는 이 트로트 신성의 인기가 상상을 초월해서다. 그의 콘서트 티켓 예매는 피가 튀는 전쟁터 수준이라 ‘피켓팅’으로 불린다. 그만큼은 아니라도 최근 많은 젊은 트로트 가수들이 장·노년층의 아이돌로 부상했다. 내 주위에도 병약하시던 어머님이 파릇파릇한 소년 가수의 열혈팬이 되신 후 삶에 활기를 찾으셨다거나, 그들의 노래를 듣는 취침 습관으로 불면증이 치료가 되었다거나 하는 ‘기적의 간증’들이 속출 중이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위인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퇴계로, 율곡로 같은 특정인 이름을 붙인 길도 등장하고, 생가 방문 성지 순례도 이어진다.
-
공감 우리가 챗GPT보다 나은 유일한 점 부부 모임에서 호스트가 게임을 제안했다. 라벨을 가린 4병의 와인을 시음한 후, 남편은 자신의 부인에게 각각의 특징을 묘사하고 부인은 어떤 병의 술에 대한 표현인지 알아맞히는 게임이다. 설명 방법은 맛과 향, 빛깔 등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제한되었다. 첫 번째 부부는 세계 각지의 와이너리를 여행 다닐 만큼 와인 애호가였다. 남편은 전문가답게 미디엄바디, 버터리, 허베이셔스 등의 표현들을 사용해 함께하는 사람들이 주눅이 들 정도였다. 두 번째 부부는 모두 문학 교수여서 남편은 한 잔 마실 때마다 짧은 시를 읊었다. 별장에서 바라본 계곡의 물줄기라든가 깊은 사랑의 표현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그토록 멋들어진 표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부인들이 맞힌 답은 0~1개 정도였다. 마지막 부부의 부인은 비싸고 좋다는 술이나 싸구려나 구별도 못할 만큼 와인에 문외한이었는데 4개를 모두 맞혔다. 남편이 부인을 잘 알고 있어서, “가장 달다, 두 번째로 달다, 세 번째로 달다, 가장 안 달다”로 설명했기 때문이다.
-
공감 권력이 저출산에 미치는 영향 남편에게 새 여자가 생겼다. 아이도 있다고 한다. 언어로는 표현 못할 참담한 나날이겠지만 30여년 결혼생활에 이혼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일. 받아들이기로 했는데 재산분할 결과 600만원을 지급한다고 한다. 부부의 총재산은 5억원 정도인데, 유책사유도 없이 받을 수 있는 금액이 1% 내외라는 것이다. 법의 문제일까. 판결의 문제일까. 노소영씨가 수년간의 이혼소송 끝에 받게 된 판결 금액이 부부 재산의 1.2%라고 한다. 남편이 물려받은 재산은 특유재산으로 분류되어 분할의 대상이 되지 않아서라는 것이다. 2022년 기준 가구당 평균자산 5억원 수준으로 환산할 때, 4억8000만원은 개인 유산으로, 공동으로 모은 재산은 2000만원 정도로 인정한다는 이야기다. 결혼 생활 34년간.
-
공감 사랑의 이해, 위대성과 위험성 사이 한국인의 모성신화는 남다르다. 가족 친화적인 문화권임을 감안하더라도 그렇다. <미나리>나 <파친코> 같은 작품들이 ‘K할머니’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며 해외에서 호평을 받은 이유이기도 한데, 한발 더 나아가 이제는 휴머노이드다. 최근 OTT에 올라와 세계 순위에 랭크된 <정이>는 전설적인 여성전사가 사망 후 전투 로봇으로 태어나지만, 친딸에 대한 기억만은 잃지 못한다는 설정이다. 현재와는 다른 미래 사회에서도 기억을 편집하든, 로봇이 되든 강렬한 혈연 본능만은 각인되고 재생되는 것이라고 믿고 싶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