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한 세상 속 무해한 세계의 상상

박선화 한신대 교수

“가장 든든한 노후대책은 결혼 안 한 딸”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그런 것 같다. 내 주위를 둘러봐도 미혼의 친구들이 노부모의 삶에 실제적인 도움과 활력을 주는 경우가 많고, 대부분 딸들이다. 아들이 부모님을 모시던 시대에도 사실상 며느리들의 일이었던 것을 보면, 돌봄 노동은 사회가 어떻게 변화하건 여성과 약자들의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선화 한신대 교수

박선화 한신대 교수

이런 노동에서 자유로운 이들 또는 남성들이 부럽다거나 억울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살아갈수록 가사·돌봄 노동의 중요성과 가치를 크게 인식하게 되었기에 의무교육이나 군대처럼 모든 사회 구성원의 필수과정이 되는 세상을 상상해 보는 중이다. 어떤 존재도 예외가 없는 생로병사를 온몸으로 체화하며 깨닫는 인생 이해능력이야말로 핵가족, 노령화, 디지털 시대의 기본 역량이 되어야 할 것 같아서다. 아이·노인·환자 등 취약하거나 소외된 존재의 신체와 정서, 생활을 접하고 보살피는 경험. 느린 발걸음과 어눌한 말투와 서툰 행위들에 눈 맞추고 발 맞춰 보는 노력. 생사의 경계가 흐릿한 공간. 초췌한 안색으로 잠 못 드는 이들의 분뇨 수발을 드는 노동 속에서, 우아함이라는 허상과 등수나 지위 따위 비루한 욕망의 덧없음과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통찰하게 되는 것보다 중요한 배움이 있을까 싶어서다.

인간은 왜 이토록 값진 일들을 하찮게 여기고 타인 위에 군림하는 삶을 추앙하게 되었을까. 내 곁에 있는 이들을 사랑해야 할 시간에 평생 만날 일도 없는 온라인 공간 누군가와의 삶을 비교하며 욕망과 분노, 절망으로 가득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을까. 그리고 왜 늘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정작 가장 소중한 일들은 하지 않는 공허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덴마크의 학자 아네르스 포그와 데니스 뇌르마르크는 그들의 저서 <가짜 노동>에서 이야기한다. 수많은 기업과 근로현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노동의 대부분은 허위라고. 미국 사무직의 실제 업무시간은 근무시간의 46% 정도이며, 온라인 쇼핑의 90%가 직장인이 가장 바쁜 척하는 월요일에 이루어진다고. 대개의 사람들은 그저 잘리지 않기 위해, 혹은 자신의 가치인증을 위해 의미 없는 시간을 확장하며 바쁜 척하는 것이라고. 오랜 시간의 기업생활 경험자로서 상당 부분 동의한다. 그런 사람들도 많았고, 야간근무와 주말출근이 없어진 후에도 회사는 계속 성장했다.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인공지능(AI) 시대에서는 사람의 역할이 더욱 단축될 것이므로, AI와의 경쟁을 걱정하기보다는 효율적인 공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한다. 학자들의 논리대로라면 개인의 노동시간 단축으로 더 많은 고용을 창출할 수 있고, 그렇게 다수에게 분할된 안정과 여유 시간은 예술과 자기계발, 양육과 돌봄 등이 중요해지는 더욱 인간적인 세상의 동력이 된다. 선순환이다. 물론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고 극복할 문제도 많겠지만, 인류는 꿈꾸는 만큼 발전해 온 존재이기도 하다. 바란다면 길을 내면 된다.

전 세계가 끝없는 양극화, 잔혹한 테러, 전쟁 등으로 고통받아온 이유는 진정으로 사람을 만나고 돌보고 이해한 경험이 없는 미성숙한 야심가들을 엘리트나 능력자로 신격화하고, 너무 많은 중요한 일들을 맡겨서가 아닐까. 진짜 필요한 일을 할 줄 아는 겸손한 이들을 경시해서가 아닐까. 상담자가 되려면 반드시 오랜 기간의 수련과 적정 시간의 임상경력이 필요하다. 일반인뿐 아니라 정치인 혹은 책임과 영향력이 큰 자리로 갈수록 가사노동 최소 1만시간, 양육이나 돌봄노동 2만시간 등의 경력과 수행 능력이 필수 스펙이자 핵심 커리어가 되는 날이 오면 좋겠다. 시대착오적 정쟁과 탁상행정, 혐오와 폭력이 사라지는 사회는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헛된 것들의 선망과 허위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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