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챗GPT보다 나은 유일한 점

박선화 한신대 교수

부부 모임에서 호스트가 게임을 제안했다. 라벨을 가린 4병의 와인을 시음한 후, 남편은 자신의 부인에게 각각의 특징을 묘사하고 부인은 어떤 병의 술에 대한 표현인지 알아맞히는 게임이다. 설명 방법은 맛과 향, 빛깔 등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제한되었다.

박선화 한신대 교수

박선화 한신대 교수

첫 번째 부부는 세계 각지의 와이너리를 여행 다닐 만큼 와인 애호가였다. 남편은 전문가답게 미디엄바디, 버터리, 허베이셔스 등의 표현들을 사용해 함께하는 사람들이 주눅이 들 정도였다. 두 번째 부부는 모두 문학 교수여서 남편은 한 잔 마실 때마다 짧은 시를 읊었다. 별장에서 바라본 계곡의 물줄기라든가 깊은 사랑의 표현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그토록 멋들어진 표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부인들이 맞힌 답은 0~1개 정도였다. 마지막 부부의 부인은 비싸고 좋다는 술이나 싸구려나 구별도 못할 만큼 와인에 문외한이었는데 4개를 모두 맞혔다. 남편이 부인을 잘 알고 있어서, “가장 달다, 두 번째로 달다, 세 번째로 달다, 가장 안 달다”로 설명했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미국 유명대학 심리학 교수의 경험담이다. 이 일화에 공감하는 이유는 자신의 지식과 표현력을 과시할 뿐 부인의 생각과 정서는 이해 못한 남편들처럼, 대개의 사람들도 교감이 아닌 스스로에 도취된 나르시스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느껴서다. 오랜 시간 만났지만 속사정도 마음도 모르고, 서로 자기 얘기만 하다가 “나 누구랑 말하고 있니?”라는 자조적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뉴스와 미디어 같은 사회적 소통공간도 다르지 않다. 독자와 시청자의 이해를 돕고 더 나은 방향을 도모하기 위한 친절한 언어보다는, 과시와 인기를 위한 글과 말들이 넘쳐난다. 공익과 정의, 모두의 알권리와 첨단지식, 문화와 예술을 논하는 지식인의 표현들은 얼마나 현학적이고 배타적인지. 국민을 위한 언론의 수준은 얼마나 국민 모독적인지. 사랑 없는 종교와 서민은 보이지 않는 서민정책, 엘리트와 부유층 MZ세대만 바라보는 MZ정책은 얼마나 게으르고 기만적인지. 다양성과 차이에 대한 성실한 이해의 노력 없이 자기중심적 착각이 앞선다.

언어를 들여다보면 발화자의 내심과 지향점이 보인다. 서민과 약자를 논하지만 내심은 권력층과 소수집단의 일원이고픈 선민의식을 가진 이들의 시선은 늘 더 높은 곳, 화려한 곳을 흘깃거린다. 사회, 경제, 종교적 사기범이나 가스라이팅 가해자들의 화법 역시 충분한 힌트를 내포하고 있다. 친밀감과 아름다운 미래를 약속하는 내용 속에 자아도취와 경직된 질서의식, 힘의 숭배와 약자 혐오의 그림자가 존재한다. 그 쉬운 것을 계속 묵과하는 이들 중에 많이 배운 사람들도 상당한 이유는 자신의 심연 또한 유사해서일 것이다.

드라마에서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꼬이는 공통적인 이유 중 하나는 남의 말을 안 듣는 것이다. 고민 끝에 전달하려는 상대의 말을 끊거나 넘겨짚어 오해가 쌓인다. 할 말과 안 할 말, 말하지 말아야 할 사람과 해야 할 사람을 구분 못해 갈등은 더욱 악화된다. 의혹이 쌓여도 상황과 마음을 잘 전달하는 능력도 부족하다. 드라마뿐만 아니라 인생에서 대개의 비극과 고통은 소통능력 부족과 소통 태도를 보는 눈에서 오는 것 같다.

현대의 인지과학·심리학 분야의 주요 연구 결과들은 학력이나 전문지식, 함께한 시간이 타인의 이해 능력과 비례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강한 자기신념과 확증편향으로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소통의 방법은 어렵지 않다. 단정하거나 추측하지 말고 직접 물어보는 것, 상대의 말과 태도에 집중하고 입보다 귀를 더 많이 여는 것이다. 세계적 이슈인 언어 AI의 비약적 발전조차 인간의 의견수렴 양에 비례한다. 정답이 있는 시험능력보다 정답 없는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이 AI도 쉽게 넘지 못하는 가장 고차원의 인간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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