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 없는 배움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송혁기의 책상물림]가르침 없는 배움

공자는 최소한의 예만 갖추면 누구나 받아들여 가르쳐주었다. 가르치기를 귀찮아하지 않는 게 자신의 장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말도 했다.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깨우쳐주지 않고, 표현하려 애쓰지 않으면 틔워주지 않으며, 한 모퉁이를 들어 말해주었을 때 다른 세 모퉁이를 미루어 생각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주지 않는다.” 가르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긴 공자였지만, 스스로 알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 없는 이는 가르치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데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치는 것이 우리 교육의 문제다. 등수를 올리기 위해,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배우고, 높은 학점을 얻기 위해,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기 위해 또 배운다. 정작 자신이 무엇을 알고 싶고 무엇을 표현해야 할지에는 별 관심이 없고, 배운 것을 가지고 더 생각해보려 하지도 않는다. 나의 필요가 아니라 누군가 정해놓은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지식을 쌓을 뿐이다. 가르침이 있을 자리가 없다.

각종 인터넷 매체의 강연 콘텐츠들이 배움의 새로운 방식으로 떠오르고 있다. 어마어마한 분량과 다양성에 이젠 깊이까지 더해져 유용성이 급격히 높아졌다. 정규교육과 달리 자신의 필요에 따라 주체적으로 검색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키오스크나 배달 앱에서 비대면으로 음식 메뉴를 고르듯이 콘텐츠를 찾아 배우고 필요 없는 부분은 넘겨 버리면 그만이다. 순자의 시대에 이미 “묻지 않는데 말해주는 것을 오만함이라 하고 하나를 물었는데 둘을 말하는 것을 떠벌림이라고 한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온라인에서는 이처럼 묻지도 않았는데 가르치려 드는 꼰대를 만날 일도 없다. 여기에도 가르침의 자리는 없어 보인다.

그러니 이제는 가르침 없는 배움으로도 충분할까?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간에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의문과 답답함에 길을 열어주는 가르침은 여전히 필요하다. 공자가 만세의 사표로 존경받는 것은 어디에서 바라보아도 똑같은 완벽한 지식의 체계를 세워서가 아니다. 제자 한 사람 한 사람과 시간을 두고 관계를 맺으며 각자의 필요와 물음에 맞는 말로 각기 다르게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비대면 교육의 시대,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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