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것을 향한 시선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송혁기의 책상물림]오래된 것을 향한 시선

새로운 어휘가 워낙 많이 등장하는 시대라서 다 따라가기는 어렵지만, 한자로 이루어진 신조어의 경우 더 관심이 가곤 한다. 한문을 공부하고 가르치다 보니 생긴 일종의 직업병이다. 얼마 전 방송 자막에서 ‘노포’라는 낯선 어휘를 발견하고는, 맥락상 오래된 가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늙을 로(老)’를 사용하여 새로 만든 어휘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찾아보니 노포(老鋪)는 신조어가 아니라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점포’라는 뜻으로 국어사전에 등록된 어휘이고, 최근 몇 년 동안 많이 사용되고 있어서 많은 이들에게 그리 낯선 어휘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언제부터 사용된 어휘인지를 찾아보니, 조선시대 문헌에는 용례가 거의 보이지 않고 중국에 다녀오며 견문을 기록한 글에서 상점 이름으로 몇 번 등장하는 게 다였다. 현대 중국어에서는 라오쯔하오(老字號)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노포는 근대 이후 일본에서 들여온 한자어인데, ‘흉내 내다, 이어가다’라는 뜻의 동사 ‘시니스(しにす)’에서 유래한 ‘시니세(しにせ)’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노포’ 대신 적절한 우리말로 순화하자는 주장도 있다.

일본어에서 유래한 한자어를 굳이 사용할 필요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노포라는 어휘의 유행에서 보이는 것처럼 오래된 것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너무도 빠른 변화 가운데 자의든 타의든 오래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갈아엎는 일을 자행해 온 지난 세기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서울시의 ‘오래가게’나 모 기업의 ‘백년가게’ 등 오래도록 이어가는 가게를 발굴해 홍보하고 지원하는 프로그램들도 반갑다.

하지만 일시적인 유행과 지원만으로 대를 잇는 가게가 탄생하고 유지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생력을 지닌 정든 가게가 한자리에서 대를 이어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시간의 축적 없이 이룰 수 없는 가치를 묵묵히 지켜가는 이들의 열정과 그 가치를 알아보고 아끼는 이들의 애정이 오래도록 온기를 주고받아야 가능하다. 가게의 존속은 영리에 달린 일이지만, 동시에 가치를 바라보는 시선과 여유의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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