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
전시기획자
최신기사
-
김지연의 미술소환 소리의 틀 강가를 지나 숲길을 구르는 상자 안에는 피아노가 있다. 덜컹거리다 넘어지는 순간은 아찔하지만, 다시 일으켜 세워진 피아노는 여전히 거친 길을 구르며 목적지를 향한다. 김영은은 ‘밝은소리 A’에서 한국에 최초로 들어왔던 피아노의 이동 경로를 구현했다. 1900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리처드 사이드 보텀이 대구로 오면서 들여와 한국 사회에 최초로 등장한 피아노는, 당시 영남지역 물류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던 사문진 나루에 도착한 뒤 대구시 중구 종로에 있는 집까지 사흘에 걸쳐 이동을 마쳤다. 작가는 ‘최초의’ 피아노가 운송되는 과정 위로, 1초간 440Hz의 진동수를 갖는 A(라) 음이 현대 악기 조율을 위한 ‘표준음’으로 자리잡기까지의 역사를 담았다. 다양한 기준을 제치고 단 하나의 기준이 전체를 아우르는 ‘표준’이 되었다는 것은 관계자들이 이미 많은 갈등과 이해의 강을 건넜다는 뜻이다. 세종대왕이 ‘황종’을 만들어 중국과 다른 조선만의 표준음을 선포하면서 독자적인 통치 구조를 정비하려 했을 때, 벌어졌던 갈등과 분쟁의 장면을 떠올려보더라도, ‘표준’을 점하는 것은 주도권을 갖는 일이다.
-
김지연의 미술소환 머니코드 잊을 틈 없이 지속적으로 문화예술계, 학계에서 터지는 표절 소식은 창작과 연구의 핵심을 돌아보게 만든다. 왜 연구의 부정행위는 사라지지 않으며, 왜 점점 더 많은 창작자들이 ‘오마주’ ‘패러디’ ‘패스티시’ ‘샘플링’ ‘레퍼런스’ 등의 단어 뒤에 서 있을까. 대중음악계의 표절 뉴스를 따라 유튜브 영상을 돌려보면서, 어디에서 어떻게 손대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만연해 있는 ‘유사한’ 음악 만들기 풍조에 지쳐갈 때쯤, ‘머니코드(money chords)’라는 단어를 보았다.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어서 유명 히트곡에 많이 쓰인다는 이 코드는 시대의 유행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단다. 분석해 놓은 내용들을 보니 동일한 코드를 공유하는 유명한 팝송, 가요가 너무 많다. 돈을 벌어다준다는 머니코드 안에서 새로운 곡을 만들려니 다 비슷해질 수밖에 없다는 댓글을 보면서, 돈이야말로 말이 안 되는 것도 합리화하는 설득력 있는 도구가 된다는 생각을 했다.
-
김지연의 미술소환 뜨개질의 쓸모 예멘의 고요한 사원에서 상의를 탈의한 남자들이 붉은 실로 뜨개질을 한다. 퍼포머의 몸을 타고 회색 공간을 흐르는 붉은색이 선명하다. 2014년부터 시작된 예멘 내전은 이해관계가 얽힌 강대국의 대리전 양상으로 확산되며 올해 4월까지만 해도, 멈출 수 있는 시점을 찾지 못했다. 전쟁의 막강한 파괴력과 폭력, 그 공포감에도 무감해질 만큼 시간이 흐르는 동안, 예멘인들은 표정을 잊었고 그저 어두울 뿐이었다. 전쟁이 앗아가는 사람들의 감정은 어디에 깃드는가. 예멘인들이 묻어버린 감정, 그 심리를 들여다보고자 거리를 촬영하는 나날을 보내던 그는 ‘뜨개질하는 법’을 소개하는 1941년 11월24일자 라이프지의 기사를 발견한다.
-
김지연의 미술소환 에어 컨디셔닝 2006년 7월13일, 헤즈볼라의 이스라엘 병사 납치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 육군이 탱크로 레바논을 공격한 이후,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전쟁은 본격화된다. 1개월 후 양국은 휴전을 결의하였으나, 이스라엘은 그들의 방식대로 전쟁을 이어간다. 이스라엘은 2007년부터 2021년에 이르는 15년간 8231대의 F-35 전투기와 1만3101대의 무인항공기를 레바논 상공에 보냈다. 지상에서는 폭발음처럼 들리는 소닉붐을 일으키는 제트기와 무인항공기, 드론은 레바논을 공포스러운 소음으로 뒤덮었고, 언제라도 폭격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일상을 살아야 했던 레바논 주민들은 심장병, 청력 상실, 수면장애 등의 후유증을 피할 수 없었다.
-
김지연의 미술소환 예술가에게 허용하는 세계 개막 3일 뒤 카셀 도큐멘타 현장에 도착하니, 반유대주의 논란 한가운데 서 있던 타링 파디의 작품 ‘민중의 정의’는 이미 철거되었다. 작품을 붙잡았을 비계와 지지대만이 어떤 사건의 흔적처럼 남겨져 있었지만, 이 역시 지워지는 중이었다. 2017년, 큐레이터 아담 심칙이 거대한 재정적자를 남겨둔 채 행사를 마무리하여 스캔들에 휩싸였던 카셀 도큐멘타는 인도네시아 출신 예술가 콜렉티브인 루앙루파를 예술감독으로 선임하면서 도큐멘타의 다음 비전을 모색했다. ‘최초’의 아시안, ‘최초’의 콜렉티브 예술감독이 되어 도큐멘타에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간 이들은 ‘유머, 관대함, 독립, 투명성, 재건, 재생’ 같은 가치를 포괄하는 인도네시아의 쌀 헛간 ‘룸붕’을 키워드로, 내용적으로나 방법론적으로나 ‘탈중심’을 지향하며 전시를 만들었다. 농작물을 나누던 과거의 룸붕은 이제 돈, 시간, 공간, 지식, 노동을 나누는 창고가 되어 공동체의 삶을 독려한다.
-
김지연의 미술소환 유인원 개인의 정보가 돈이 되는 사회에서 나는 나를 보호할 수 있을까. 이제는 더 이상 인터넷 화면 곳곳에 내 관심사와 닿아 있는 광고가 뜨고, 휴대폰 주위에서 벌어지는 대화를 들은 SNS가 피드 사이사이에 관련 광고를 띄우는 일상에 놀라지도 않는다. 주기적으로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을 만큼 개인정보 보안에 안일해졌고, 주고받는 메시지를 보호하기 위해 엔드 투 엔드 암호화를 적극 사용하지도 않는다. 누군가 나의 정보를 엿보고 있다는 사실은 불쾌한 일이지만, 그런 현실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
김지연의 미술소환 노동의 싱글 숏 침대에 누워 있는 하반신 마비 환자를 도와 휠체어에 앉히는 사람, 소의 발바닥에 편자를 신기는 사람, 도로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사람, 주방에서 양파를 까는 사람, 재봉틀을 닦는 사람, 산타클로스 복장으로 거리를 행진하는 사람, 쇼핑몰에서 인형탈을 쓰고 호객하는 사람, 인쇄소에서 인쇄물을 살피는 사람, 수술하는 사람, 사제복을 입는 사람, 페디큐어를 하는 사람, 시위대를 저지하는 사람, 죽은 도마뱀을 나르는 개미. 이들은 모두 노동 중이다. 하룬 파로키와 안체 에만은 2011년부터 워크숍 형식의 프로젝트 ‘노동의 싱글 숏’을 시작했다. 워크숍 참가자들은 유급, 무급, 유형, 무형, 전통적인 것, 새로운 것 관계없이 그들이 선택한 ‘노동’을 1~2분 사이의 싱글 숏에 담는다. 카메라를 고정시키거나 움직이는 것은 참가자의 자유지만, 컷을 나누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때 이들이 고민해야 하는 것은,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노동을 카메라에 담을 때 그 시작과 끝을 어떻게 설정할 것이며, 노동의 흐름을 흥미롭게 기록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느냐의 문제다.
-
김지연의 미술소환 15분간의 명성 “미래에는 누구나 15분 동안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수 있다.” 지금의 미디어 환경을 생각해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이 문장은 앤디 워홀의 말로 알려졌지만, 다른 이들의 발언이 와전된 것이라는 의견이 분분한 덕에 계속 그 유명세를 이어가는 중이다. 기억 저편으로 밀어두었던 이 문장을 최근 본 다큐멘터리 <앤디 워홀의 다이어리>가 상기시켰다. 대중의 욕망을 읽어내는 데 탁월했던 앤디 워홀은 1985년, 음악전문 케이블TV 채널 MTV와 이 문장을 상기시키는 프로그램 <앤디 워홀의 15분>을 기획하고 진행했다. 그는 부자, 유명인, 예술가, 스타 등 ‘명성’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텔레비전 안에 모았다. 이 포스트모던 버라이어티쇼는 워홀이 사망한 1987년까지 약 2년 동안 5회의 에피소드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코트니 러브 등 당시의 화려한 라이징 스타를 비롯해 오노 요코 같은 예술가들을 소개했다. 회당 최대 30명의 게스트가 출연해, 워홀의 진행에 따라 그가 유명해지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심지어 자신의 특기도 선보인다. 워홀은 게스트 인터뷰, 라이브 연주, 뮤직비디오를 현란한 카메라 움직임에 뒤섞어 구성하면서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여주고, 보고 싶어 하도록 만들 줄 아는 창작자 워홀은 대중을 흔드는 ‘명사’의 힘을 예견했고, 이용했다.
-
김지연의 미술소환 운명의 수레바퀴 타로카드 10번 ‘운명의 수레바퀴’를 읽는 열쇳말은 우연, 행운, 윤회·순환, 계절의 변화, 덧없음, 변경 가능성, 위반 등이다. 이 카드는 행운도 불행도 모두 일시적으로 지나가고, 시작은 끝이고 끝이 다시 시작인 것처럼 인생은 순환 속에 작동한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이번 베니스비엔날레 폴란드 국가관 참여 작가 마우고르자타 미르가-타스는 국가관 전면에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제작한 타로카드 콜레오니-바글리오니 덱의 도상을 참고하여 ‘운명의 수레바퀴’를 설치했다. 베니스비엔날레 역사상 국가관 대표작가로 초대받은 최초의 롬인(집시) 예술가 미르가-타스는 이탈리아 페라리의 팔라초 시파노이아에 있는 프레스코화를 모티브로 하여 ‘롬인’의 문화 예술 역사를 마치 거대한 달력 내지는 역사서처럼 12개의 대형 직물로 표현한 작업을 선보였다. 유럽미술사에서 롬인 공동체의 자리를 제대로 찾고자 하는 작가의 시도가 펼쳐진 전시장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거쳐야 한다.
-
김지연의 미술소환 도청을 지킨 새벽의 전사들 여전히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고통의 시간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섣불리 이제 그만 잊으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현재진행형인 역사적 날을 통과하면서,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기 위해 희생한 이름 없는 많은 이의 피에 한없이 감사하게 되는 계절이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장담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오늘이 먼 과거보다는 나아졌다고 믿고 싶다. 퇴행의 날 안에 멈추어 있는 것만 같은 오늘도, 먼 과거 중 하루로 여겨질 미래의 오늘을 바라본다면, 조금씩 나아져가던 날 가운데 하루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지금을 살고 있는 자들은 지금을 제대로 기억하고 기록할 일이다. 기록을 선택하고 기억을 왜곡하여 새로운 역사를 쓰고자 하는 이들의 불순한 욕망 앞에, 기록이 배제하려는 숱한 사람의 역사는 나약하므로.
-
김지연의 미술소환 매듭 참여 작가 가운데 90%가량을 여성으로 구성한 올해의 베니스비엔날레는 황금사자상, 평생공로상 수상자 가운데 한 명으로 세실리아 비쿠냐를 선정했다. 1948년 칠레에서 태어난 비쿠냐는 작가, 영화제작자, 시인, 활동가 등의 역할을 아우르며 환경 파괴, 인권, 전 지구화 이후의 문화 동질화 현상 등 현대사회가 당면한 문제에 접근한다. 순수미술을 전공하던 대학원생 시절, 그는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권을 출범시킨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활약을 지켜보았다. 런던으로 유학길에 오른 후 1년이 지난 1973년, 아옌데가 이끄는 인민연합 정부가 미국 지원을 받았다는 의혹을 안고 있는 피노체트 주도의 군사쿠데타로 무너졌다. 독재정권의 학살을 피해 망명길에 오른 수십만 칠레인과 마찬가지로 비쿠냐는 귀국을 포기했다.
-
김지연의 미술소환 미래학 회의 미래는 거의 인간의 상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상상은 발명의 촉매가 되어 현실을 만든다. 그러므로 상상은 미래를 예언한다. 가상인간 로지의 활약상을 보면서, SF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MZ세대가 선호하는 얼굴형을 모아 3D 합성 기술로 탄생한 외모가 빛나는 로지는 가수로 활동하면서 기업의 협찬을 받고 광고모델로도 활약한다. AI 음성합성 기술이 만들어준 목소리를 장착한 로지는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게스트로 출연한다. 로지 외에도 한유아, 루이, 김래아 등의 가상 인간들이 아티스트로, 인플루언서로 온라인 공간을 누빈다. 이제 아리 폴만이 2013년 발표했던 ‘더 콩그레스’가 보여준 세계가 실현될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