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밤, 서울의 봄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송혁기의 책상물림] 서울의 밤, 서울의 봄

<서울의 봄>, 참 잘 만든 영화다. 기록영화 느낌에서 어느새 극적으로 고조되고, 캐릭터의 디테일에 빠져드는 순간 실제 인물이 상기되며 아찔해진다. 섬세한 조명과 음향마저 의도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능숙한 편집, 알맞게 친절한 자막과 그래픽에, 주연부터 조연까지 그 많은 배우의 연기가 저마다 빛을 발하며 빈틈없이 맞아들어가, 그날 그 자리로 박진감 있게 끌고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참 불편한 영화다. 선과 악의 선명한 대결이라는 판을 펼치고 그 악에 탐욕, 야비, 잔인, 기만, 그리고 징그러운 가벼움까지 온갖 혐오스러운 것을 다 버무려 넣고는, 악이 어떻게 승리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게다가 이 9시간이 이후 어떤 참혹한 역사로 이어졌는지를 보는 내내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이 영화 안에서만 승리한 게 아니라 그날의 성공을 기념하는 잔치를 벌이며 천수를 누렸음을 알기에, 불편함은 점차 울화로 차오른다.

영화는 어떤 인물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던 순간들이 있음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그 역시 울화를 더할 뿐이다. 이태신에게 부질없는 기대를 하게 되지만, 그는 늘 혼자고 저들은 떼거지다. 온갖 노력이 다 실패한 뒤 전두광을 향해 “너는 대한민국 군인으로서나 인간으로서나 자격이 없어”라는 말을 비장하게 던지는 게 고작이다. “백이숙제처럼 훌륭한 사람은 고생만 하다가 굶어 죽고, 잔인무도한 도척은 하고 싶은 대로 살며 천수를 누리다니, 도대체 하늘의 도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2000년 전 사마천이 던진 의문이 여전히 와닿는다.

하지만 대세에 편승해 아무도 맞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울화를 증폭시키는 인물들의 극점에 대통령 최한규가 있지만, 서명 아래에 굳이 시간을 적음으로써 계엄사령관 체포가 동의 서명보다 앞섰다는 기록을 남겼다. 무모한 항전, 사소한 기록 덕분에 그나마 훗날 저들의 범죄가 입증될 수 있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실낱같은 불씨 하나를 꺼뜨리지 않으며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차가운 서울의 밤을 그려놓고 오지도 않은 서울의 봄을 제목으로 삼은 뜻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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