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날, 봄 한 잔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송혁기의 책상물림] 겨울날, 봄 한 잔

선조 때 문인 최립은 중국 사행길에 오르는 이민각을 전송하는 시를 이렇게 맺었다. “듣자니 떠나며 늙음을 한탄했다던데, 강 건널 때 흔쾌히 황금을 던지시려나?”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를 가져와 멋을 부린 구절이다. “술 실은 배마다 연이어 좋은 술 사는 일 아까워 마시게. 천금을 한번 던지면 꽃다운 청춘을 살 수 있으니.” 젊은 날로 돌아가는 유일한 길은 술에 흠뻑 취하는 것뿐. 늙음을 한탄할 게 아니라 술값이나 호방하게 쓰라는 뜻으로 건네는 농담이다.

술이 잠시나마 인생의 봄날 같은 청춘을 회복시켜 주는 힘을 지녀서일까, 술은 예로부터 봄으로 불려 왔다. “춘주(春酒)를 빚어 장수를 기원한다”는 <시경> 구절에서 이미 술에 봄이 붙기 시작했고, 사공도는 24가지 시품 중 ‘전아(典雅)’를 표현한 시에서 “옥 호리병에 봄을 사다가 초가집에서 비를 즐긴다”고 하여 아예 술을 봄이라고 불렀다. 소식이 즐겼다는 동정춘(洞庭春)을 비롯해 검남춘, 호산춘 등 봄이 들어간 술 이름이 많은 것도 그래서다.

근대 한학자 김윤식은 “술을 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술이 사계절의 기운을 변화시켜서 모두 봄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도자기가 술 담는 그릇이 되고 누룩이 술 빚는 재료가 된다는 것만 알 뿐, 시(詩)를 그릇과 재료로 삼지 않고는 천지의 화평한 기운을 빚어 만든 사계절의 봄을 갈무리해 둘 수 없다는 사실은 모른다”고 했다. 황종교의 <옥호도(玉壺圖)>에 써준 서문의 도입 부분이다.

<옥호도>는 모든 구가 ‘춘(春)’으로 끝나는 16수의 시를 호리병 형태로 쓴 작품이다. 칠언율시 2수를 나란히 내려써서 가늘고 긴 병목을 만들고, 칠언절구 8수를 방사형으로 적어서 병의 볼록한 배처럼, 6수는 그 아래에 써서 몸통처럼 보이도록 했다. 김윤식은 “뱃속의 기운 하나가 입에 이르는 것은 동짓날 양(陽) 하나가 땅 밑에서 생겨나 봄이 되면 싹이 되어 나오는 것이다”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얼마 전 지난 동지는 추위의 절정인 동시에 미미하게 자라기 시작한 봄에 대한 희망이기도 하다. 젊음을 한 해 더 떠나보내야 하는 이 겨울날, 시와 함께 봄을 마시며 나의 봄을 갈무리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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