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서 삶을 묻다

제주에 살면서 비행기를 자주 이용했다. 할 줄 아는 게 기록이라, 몇년간 차곡차곡 쓸데없는 것들을 모았다. 출발·도착 예정시간과 실제시간, 지연 횟수와 이유, 비행기 내부에서 본 것들 등등. 국내선에 국한된 개인 경험이지만 데이터를 누적하니,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삶의 태도가 왜 중요한지도 느껴지고, 아기자기한 세상 이치도 어렴풋이 보인다.

놀라지 마시라. 비행기가 탑승권에 적혀 있는 시간에 이륙할 확률은 1% 미만이다. 제때 입장이 시작되어도, 이런저런 짐을 든 150~180여명을 20분 만에 태우는 건 어렵다. 일부러 가장 먼저 탑승해 기록을 해보니 출입문 닫힐 때까지가 평균 24분, 이륙까지는 35분이 걸렸다. 모든 게 순조로워도 2분에 한 대가 뜨고 내리는 김포나 제주공항에서 활주로 대기는 일상이다. 그러니, 10시 출발 비행기가 9시59분에 이륙한다면 그날이 행운의 날이다.

걱정 마시라. 늦게 출발해도 예정시간 즈음에 착륙할 확률이 55%다. 지름길이라도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20분 늦게 이륙했는데 5분 빨리 착륙하는 건 흔하다. 열에 네다섯 번은 출발부터 지연되지만 1시간 이상 늦어지는 경우는 전체의 9%다. 그러니 오늘 탈 비행기가 당신을 속상하게 하더라도 ‘지연 총량의 법칙’을 믿고 앞으로 열 번은 별일 없을 것이라고 낙관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아, 지연이 되면 사람들은 그게 저가항공일 때만 ‘저가항공이라서 그렇다’는 식의 말들을 자주 한다. 하지만 그 차이는, 없었다.

승객 탑승 이후에 문제가 생겨 다른 편으로 대체되는 경우엔 최소한 3시간은 일정이 뒤틀린다. 하지만 0.5% 정도다. 답답하겠지만, 혼비백산인 지상직 승무원들에게 고함지른다고 달라질 건 없다. 200번에 한 번이라면 ‘뭐 그런 거지’라는 태도로 버티는 게 최선이다. 고 어라운드, 비행기가 착륙하려다가 다시 상승하는 ‘착륙보행’은 제법 경험했는데 그래봤자 2%다. 곧 착륙하는 줄 알았던 비행기가 20~30분을 빙빙 돌고만 있으니 어찌 마음이 평온하겠냐만 위험보다 안전을 택한 조종사의 선택을 존중하는 게 당연하다.

수화물 기준을 어겨 제지당하니 본인이 더 화를 내는 사람, 제주공항에서 면세점 쇼핑하다가 늦게 타는 예의 없는 사람, 승무원에게 반말하는 사람, 승객끼리 싸우는 사람 등등 꼴불견은 분명 있지만 자주 만나진 않는다. 그 사람의 무례함을 두둔하자는 게 아니라, 짜증을 이유로 ‘요즘 사람들 이상하다’면서 괜한 감정소모 말자.

아이들 울음소리는 이륙 전에는 자주 들리지만 기체가 움직이면 잠잠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당신 앞에서 아이가 울고 있으면 ‘자리 잘못 잡았네. 이러니 노키즈존이 필요하지’라고 생각하지 말고 한번 방긋 웃어줘라. 검증된 건 없지만, 아기는 뒷자리나 대각선 승객의 웃음에 잘 반응한다. 그 교감 한 번이면, 아이가 울어도 이해된다. 그렇게 사는 거다. 옆에 앉은 사람 열의 다섯은 잤고, 나머지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시간을 보냈다. 종이책 읽는 사람은 지난 4년간 내 옆자리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전자책도 없었다. 아, 그리고 날씨 문제로 공항이 아수라장이 될 때 말이다. 그 고생, 어딜 가서 이야기한들 걱정해 주는 사람 별로 없다. 비행기란 그런 거다.

오찬호 <민낯들: 잊고 또 잃는 사회의 뒷모습> 저자

오찬호 <민낯들: 잊고 또 잃는 사회의 뒷모습>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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