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는 전쟁의 ‘브레이크 타임?’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지난 금요일부터 3일에 걸쳐 한·일 역사가 23회째 회의가 서울대에서 있었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 후 모임이 만들어진 이래 올해가 23회째다. 한·일관계의 파탄, 코로나19 등 난관을 뚫고 어렵사리 23년째 계속해 오다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주제는 <역사에서의 전쟁과 문명>이었다.

<서양 과학기술문명의 야누스적 두 얼굴-양차 세계대전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이내주 교수는 3500년에 걸친 인류문명의 역사에서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불과 268년이었다는 통계를 소개하며 얘기를 시작했다. 정말 그렇다면 평화란 다음 전쟁을 기다리는 동안 잠깐의 휴식일 뿐인 셈이다. 참 무서운 얘기다. 이 통계의 당부(當否)는 차치하고라도 인류가 부지런히도 전쟁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류의 수명과 생활수준의 향상에 획기적으로 기여했지만, 불행히도 전쟁 사상자의 수를 늘리는 데에도 획기적으로 기여했다. 대포, 기관총, 핵무기 같은 대량살상무기 때문만은 아니다. 철도의 발달로 많은 병력과 무기를 전선으로 투입하는 일이 수월해져 그만큼 희생자도 늘어났다. 더욱 안 좋은 것은 민간인 희생자의 급증이다. 급기야 2차 세계대전에서는 민간인(3000만명)이 군인 희생자 수(1800만명)를 넘는,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전쟁 형태가 한 나라의 경제력을 총동원한 총력전 형태를 띠다 보니 군수기지, 경제도시 등 민간인 거주지가 공격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중폭격은 그 주요 방법이었는데, 폭탄투하 버튼을 누른 사람은 수많은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광경을 보지 않고도 ‘차갑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최근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드론 공격 중지를 요청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드론은 더 ‘차갑게’ 사람을 죽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난 인명피해의 숫자(1차 세계대전 3000만명, 2차 세계대전 5000만명)를 보면, ‘근대문명의 진보’ 운운은 차마 입이 떼어지지 않는 일이다.

인류라는 동물에게 전쟁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전쟁을 ‘문명화’할 수 있을까. 사사키 마코토 교수의 ‘전쟁은 문명화하였는가?’란 발표는 이 질문을 고민한다. 15세기경까지 유럽에서 전쟁포로는 살해되었는데, 그건 무도한 일로 간주되지 않았다. 여성과 아이는 노예로 전락했다. 그에 비하면 근대 전쟁은 훨씬 ‘문명적’인 것일지 모른다. 루소는 전쟁할 때 적이 되는 건 적국 내의 모든 사람이 아니라 조국의 수호자로서의 병사뿐이라며 병사를 살해하는 것은 허용되나 그 외 사람의 생명과 재산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했다(<사회계약론>). 그에 기초해 1864년 제네바 협약, 1899년 헤이그 육전조약 등 전쟁규칙이 정해졌다. 그렇다면 20세기 전쟁은 ‘문명화’되었는가. 위에서 언급한 대로 공중폭격도 애초엔 군사목표만을 대상으로 하는 정밀폭격론이 우세했다. 그러나 각국의 국민들이 총동원되고 상대에 대한 증오가 심화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나치의 슬라브 민족 멸시, 일본의 귀축영미(鬼畜英美) 슬로건, 미국에 의한 일본인 멸시 슬로건 등은 그 예다. 상대 인종의 박멸과 적국 체제의 타도(무조건 항복)를 추구하는 가운데, 정밀폭격론이 설 자리는 없어지고 무차별 폭격이 횡행했다. 이는 서로 간 보복폭격으로 이어져, 악명 높은 드레스덴 폭격(1945년 2월)처럼 군사적 의미가 없는 잔인한 폭격까지 행해졌다.

저런 끔찍한 경험에서 인류가 많은 것을 배웠을 거라는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내가 살아왔던 20세기 후반은 조금 길었던 전쟁의 브레이크 타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이어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이 발발했다. 전자에서도 형언키 어려운 일들이 벌어졌지만, 후자는 ‘전쟁은 문명화되었는가’라는 물음 자체를 부질없게 만들어 버렸다. 우리에게 브레이크 타임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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