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한국 근대사상을 꿈꾸며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 연구팀의 팀 티칭에 나도 한자리 끼게 된 것이었다. 사학과가 아닌 학생들과 하는 수업은 항상 즐겁다(물론 사학과 수업이 재미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역사학도들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던지는 아이디어와 질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대, 자연대 등 이과생들은 특히 그렇고 사회대 학생들의 반응도 늘 신선하다. 역사학도들(역사학자 포함)은 뭔가 특유의 시각, 문제의식 심지어는 공통의 표정이 있다. 그게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지만, 자칫 집단사고(group thinking)로 경직화할 우려가 있다. 역사학도들은 다른 전공, 다른 직업군의 사람들을 널리 접해보는 게 좋다.

얘기가 처음부터 옆길로 샜다. 다시 돌리자. 학생들에게는 논문 두 편(김종학 ‘조일수호조규는 포함외교의 산물이었는가?’·홍종욱 ‘3·1운동과 비식민지화’)을 미리 읽어오라고 했다. 이 논문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근대사상(近代史像)에 균열을 내는 글들이다. 1873년 말 일본에서는 정한론을 둘러싸고 대규모 권력투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정한론 반대파가 집권했다. 이들은 하야한 정한론파를 의식해 하루속히 조선과 국교를 맺어야 했다. 김종학은 일본이 조선 정벌을 단행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고 그렇다고 국내의 긴박한 정세 때문에 빈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강경일변도로 나설 수만은 없었고, 어떻게든 조약 체결을 성공시키기 위해 온갖 회유와 기만이 난무했다는 것이다. 국내 정치적 이유로 일본사절단은 ‘조선과 강압적으로 조약을 체결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연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협상 과정은 “일본의 권력자들이 정치적 곤경에서 탈출하기 위해 고안해낸 하나의 거대한 쇼”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약 체결 과정은 강압에 의해서만 진행되지는 않았고, 조선의 협상단은 나름대로 선전해 요구를 꽤 관철시켰다.

홍종욱은 이른바 ‘문화정치’를 제1차 세계대전 결과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비식민화(decolonization)로 파악한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1914)하기 불과 4년 전에 버티고 버티다 막판에 식민지가 된 조선은 어떻게 보면 식민지가 되자마자 비식민화의 물결을 만난 것이다. 그러니 그 식민통치가 제대로 먹힐 리 없었다. 문명기 교수는 대만과 비교할 때, 조선총독부 정책의 조선 사회 침투도가 현저히 떨어졌다는 점을 재정정책, 의료(위생)정책, 경찰 행정력 등을 소재로 증명하면서 그 원인을 조선의 ‘강한 사회(strong society)’에서 찾고 있는데(‘대만, 조선총독부의 전매정책 비교연구’ 등 다수의 논문), 그 식민화의 시점(始點)과 국제환경도 고려해볼 만하다. 3·1운동에 혼쭐이 난 일제 당국자들은 그런 일이 재발할까 ‘우려와 공포’를 갖고 있었다. 이런 변화된 정세하에서 동화·자치·독립의 옵션을 놓고 식민자와 피식민자는 얽히고설켜 들어갔다. 내선일체 정책도 다른 ‘부작용’을 낳았다. 내선일체가 표방한 민족차별 철폐의 명분 때문에 사회단체 중에는 조선인이 지부장, 일본인이 부지부장을 맡는 곳도 생겨났고, 영화 중에는 조선인 의사에 일본인 간호사가 나와 ‘민족위계’의 ‘전복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가해자, 조선=피해자’라는 프레임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역사인식은 ‘일본=승리자, 조선=패배자’, ‘일본=만능, 조선=무능’이라는 틀을 사실 이상으로 각인시킨다. 그로부터는 반일주의도 생겨나지만, 패배주의도 고착된다. 한국병합은 암울한 일이었지만, 그 3년 전인 1907년 조직된 신민회(新民會)는 공화정 수립을 공식 방침으로 채택했다. 이 시기에 나라는 잃었지만 시민은 탄생했으며, 왕정은 사라졌지만 공화정의 원형은 등장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한국에만 있는 속담이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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