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과 수양버들

이선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이 세상에는 오직 두 가지 힘만 존재한다. 칼과 정신이다. 그러나 종국에 칼은 정신에 정복될 것이다.” 전 유럽을 칼로 휩쓸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한 말이라 고개가 갸웃해진다. 인생의 황혼기에 했던 회한의 말이 아니라, 한창 전성기에 한 말이라니 더욱더 의외다.

수많은 전쟁에 앞장섰던 상황을 단지 그의 호전성 때문이라 말할 수 없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열혈 독자이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몇 번씩 읽었던 그는 꽤 감성적인 군인이었다. 수천명의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뒤엉켜 숨진 전쟁터에서 그는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그 비통함을 전하며 평화를 간청하기도 했다. 칼과 정신의 힘을 잘 알고 있던 그도 그 말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거니와 전쟁의 수레바퀴를 자기 혼자 멈춰 세울 수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1815년 6월, 결국 그는 워털루 전쟁에서 영국에 대패한 후,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약 2800㎞ 떨어진 외딴섬 세인트헬레나로 추방당했다. 영국군 총독 허드슨 로와의 갈등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거처인 롱우드 하우스 주변에 정원을 가꾸며 집필과 독서로 생활하였다. 종종 인근 계곡 근처의 샘 주변을 산책하였는데, 그곳에 자라는 수양버들 아래의 벤치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유럽에서 북아프리카까지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수십년간 전쟁을 치렀던 나폴레옹. 그런 그가 말년에 즐겨 찾던 곳이 수양버들 아래였다니, 바람 따라 흔들리는 버들가지가 회고적 감정을 부추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파리의 센 강변에 묻히고 싶다는 그의 유언과는 달리, 1821년 5월 그는 자주 찾았던 수양버들 그늘에 묻혔다. 혹시 수양버들 가지가 그의 영혼을 붙잡고 심연을 들여다본 것일까. 무덤가의 산발한 수양버들이 통곡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무덤을 찾았다. 방문객들은 너도나도 무덤가에 자라는 수양버들 가지를 잘라 갔다. 이렇게 번져나간 클론은 지금까지 유럽과 호주, 미국 등지에서 나폴레옹을 기린다. 이 수양버들을 ‘나폴레옹버드나무(Salix napoleona 또는 Salix bonanparta)’라고도 부르지만, 정식 학명은 수양버들(Salix babylonica)로 통칭한다. 1840년 그의 시신은 파리의 앵발리드 묘지로 송환되었고, 추모식은 매년 파리와 세인트헬레나섬에서 동시에 거행된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참혹한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칼은 정신에 정복될까? 나폴레옹은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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