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들려준 이야기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여느 사람들보다는 책을 조금 더 읽는 편이긴 하지만 크게 배우거나 공감하는 책을 만나는 일은 드물다. 몰랐던 지식을 얻는 즐거움은 자주 있어도 ‘삶이 송두리째 변화한’ 경험 같은 건 돌이켜보건대 없는 듯하다. 그러다 최근에 만난 김해자 시인의 <위대한 일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는 굳어버린 마음을 흔들고 공감케 하는 언어가 매 쪽마다 가득하여 책의 거의 절반에 밑줄을 치며 읽었다. 농부들의 삶과, 자연이 전해준 시와, 환대와 우정의 생생한 이야기에 눈시울이 뜨뜻해지고 말았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주변 사람들은 나를 도시 태생일 거라 어림짐작하고 나 역시 대도시에서만 살아온 지 오래이지만, 내게도 땅에 대한 기억이 조금은 있다. 어릴 적 시골 소읍에서 자라면서 집 앞 텃밭과 동네 논밭에서 흙덩이를 만지며 땀 흘리던 추억이 아련하다. 땅은 얼마나 신비로운지 봄에 묻은 씨감자 한 톨에서 감자덩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나오고, 여릿한 배추 싹이 어느 틈에 큰 포기로 자라는가 하면, 고춧대 몇 십 주에서 한 가마니 고추가 나온다.

땅에 사는 사람들은 땅을 닮는가 보다. 별로 해주는 것도 없는데 한없이 베푸는 땅처럼 그이들은 하루가 멀다고 나물과 참기름과 단감과 수수팥떡을 나눈다. 손이 커서 듬뿍듬뿍 베푸는 것도 땅을 닮았다. 자본주의적 교환의 세계와 순수한 물질계에 기초한 삶의 방식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김해자 시인은 묻고 있었다. “저는 가끔 자본주의의 교환 방식과 전혀 다른 이상한 자연의 계산법에 놀랄 때가 많습니다. 농사지으면서 대지와 순수하게 주고받는 관계를 많이 맺을수록 인간에게도 순수하게 주고받는 관계가 성립합니다. 경외와 신비를 동반하는 그 마음은 자연 그 자체, 즉 신의 마음이 아닐까 짐작할 뿐입니다.”

김해자 시인이 따르는 녹색평론의 고 김종철 선생, 김종철 선생이 따르는 이반 일리치는 공히 성장과 교환의 논리가 지배하는 이 사회가 세 가지 큰 위기를 낳고 있다고 경고한다. 생태적·사회적·실존적 위기가 그것이다. 성장이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 거라는 저 이데올로기는 한쪽으로는 자본, 다른 쪽으로는 전문기술의 이익에만 봉사했을 뿐 우리 모두에 대해서는 (1)환경오염과 기후위기라는 물질적 차원의 퇴행, (2)불평등 심화로 인한 사회 지속성의 악화, (3)자본 생산품과 전문가적 돌봄에 기대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실존적이고 정신적인 무능을 낳았다고 한다.

나는 반성한다. 나는 오래도록 위 선생들의 생각을 접하면서도 땅에 대한 이야기를 감상적 자연주의쯤으로 선을 그은 게 사실이다. 저 뜨거웠던 1980년대의 정치운동, 노동운동의 이탈자들이 택한 길이 생태주의 귀촌이나 문화운동이라고 내심 폄하하곤 했다. 노동현장에서 출발해서 시를 쓰고 결국 농촌에 도달한 김해자 시인의 경험은 그것이 낭만적 감상성이 아니라 그 어떤 논리보다 단단한 체험에서 나온 것임을 알려준다. 손수 땅에서 생산하고 나눠보지 않은 사람들이 말로 추구하는 이 사회의 허약한 진보가 어떤 것인지를.

이반 일리치는 자전거와 도서관과 시를 ‘공생의 도구’로 설명한 바 있다. 도로와 에너지를 독점하여 속도를 누리는 자동차 대신 인간의 힘으로 구르는 자전거, 획일화와 쭉정이 골라내기가 주목적이 된 학교 대신 스스로 배우는 도서관, 삶을 떠난 허황된 지식보다 몸과 자연의 경이를 담아내는 시가 만인이 공평하게 즐거운 세상을 만드는 도구라고 했다.

<위대한 일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에는 동네 할머니가 시인의 손을 잡으며 했다는 말이 몇 차례 나온다. “해자 씨, 나 죽을 때 옆에 있어줘.” 일리치와 그의 평생의 벗 리 호이나키는 죽음의 순간에 동반자가 있다는 사실이 인간의 삶 전체를 말해준다고 보았다. 죽음과 친구가 되는 마지막 실존의 순간을 환대와 우정으로 채울 수 있다면 우리 삶은 어쨌든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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