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막에서 만든 책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책 만들기에 관한 예전의 경험담을 가끔 꺼내면 사람들은 꽤 재미있게 또는 신기하게 듣기는 하지만, 이제는 사라진 한때의 이야기로 소비하고 곧 잊어버린다. 회고담 또는 ‘라떼는…’ 따위의 이야기로 들릴까봐 늘 조심스럽지만 아무렴 어떠랴. 시대가 변하고 사물이 바뀌면 그것에 얽힌 경험과 말들도 희미해지는 법.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는 “사물이 바뀌는 만큼 어휘가 바로 바뀌는 것은 아니어서, 이제는 의미가 달라진 어휘가 과거를 오늘의 잣대로 잘못 이해하게끔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말에 따르면 사라진 것은 단어가 아니라 그것에 결부된 경험과 기억이겠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게라’ 같은 용어가 그러하다. 오래전 활판인쇄로 책을 만들던 시대에는 인쇄 직전에 시험 인쇄한 교정쇄가 있어서 저자와 편집자가 그것을 가지고 마지막 교정을 보았다. 프린터 출력물도 번거로워 화면으로 교정을 끝내는 지금의 눈으로 보자면 느리고 불편한 과정이었다. 인쇄소에서 막 가져온 잉크가 묻어나는 이 교정쇄를 ‘게라’라고 불렀는데 영어의 갤리(galley)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게라는 인쇄판에 전지 한 장을 수동으로 찍어 접지한 것으로, 16쪽 내지 32쪽으로 되어 있었다. 접지된 인쇄물의 페이지 배열이 맞으려면 먼저 접지 순서에 맞게 각 페이지를 인쇄판에 앉혀야 하는데, 이 작업을 ‘하리코미’(터잡기)라 불렀다. 이렇게 인쇄된 32쪽 단위의 인쇄물을 여러 개 묶어 제책하면 책 한 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편집과 인쇄를 거쳐 한 권으로 묶은 책이 나오기까지 제작과정이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으나, 사람의 손이 개입하는 범위는 많이 줄어들었다.

우리가 접하는 텍스트는 기호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보고 만지는 사물이어서, 그 사물을 온몸으로 감각할 때와 기호로만 대할 때의 무게는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아주 잠깐의 활판 시대를 경험하고 바로 사진식자와 필름으로 인쇄판을 만드는 초창기 옵셋 시대에 편집자 생활을 시작했기에, 오늘날 전자적으로 유통되는 텍스트들의 일회성과 휘발성을 더 민감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이제는 텍스트 한 줄, 글자 한 자에 들이는 땀과 시간이 줄어들어서 매일 온라인에 가득 채우는 텍스트들은 하루만 지나면 잊히고 버려진다.

얼마 전 일본 쇼와대학 연구팀이 종이책과 전자책의 독해력 차이를 조사한 연구에서는 종이책을 읽은 사람이 스마트폰으로 전자책을 읽은 사람보다 같은 책의 내용을 더 잘 파악하고 기억하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책은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손끝으로 만지고 책갈피 앞뒤를 한번에 뒤적이며 오감으로 읽는 것이다. 우리는 글자와 문장이 아니라 책이 놓인 장소와 그곳의 냄새와 글자 모양과 글줄의 위치로 텍스트를 기억한다.

내가 존경하는 일본의 노장 편집자 선생님이 사석에서 “출판은 본질적으로 코티지(오두막) 산업이에요. 절대로 대량복제 방식의 산업이 될 수 없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요컨대 책은 오두막에서 만드는 치즈나 양초처럼 손으로 일일이 텍스트를 짜고 거르고 녹이고 굳히는 과정 없이 자동화로 생산하기가 불가능한 제품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검고 찐득한 잉크와 펄럭이는 종이에 실려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전자책을 책이 아니라고 말하거나 그 기능과 장점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텍스트가 한없이 가벼워진 시대, 무겁고 느리고 둔한 감각 속에서만 서식할 수 있는 사색의 기쁨이 차츰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서다. 책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경험과 앎의 차원이 있다. 유튜브로 뭔가를 배운다 해도 그것은 동일한 지식과 정보가 아니다. 2021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서는 일 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이 처음으로 과반에 달했다고 한다. 더 문제는 누구도 이런 상황을 그리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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