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 사과에서 복사학위까지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며칠간 SNS를 뜨겁게 달군 ‘심심한 사과’ 논란에 뒤늦게 한마디를 얹을 필요가 있을까 싶어 조심스럽다. 이미 많은 분들이 이 문제에 대해 설득력 있는 진단과 공감이 가는 비판을 내놓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논란의 배후에 있는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징후가 눈에 걸려 사족이 될 것을 무릅쓰고 몇 마디를 얹는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시작은 서울의 한 카페가 웹툰 작가 사인회를 연기하면서 예약자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는 표현을 쓰면서부터였다. ‘심심한 사과’를 ‘심심하다’는 뜻으로 오독한 예약자들이 비난과 욕설을 퍼부으면서 문제가 불거졌는데, 예약자들이 자신들의 어휘력 부족과 무지를 인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당당한 태도로 그런 어려운 말을 쓴 상대를 비난한 것이 논란을 키운 원인이 되었다. 이에 대해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거나 젊은 세대의 문해력 저하 또는 실질 문맹률을 걱정하는 말들이 나왔지만, 이 진단들은 확실히 번지수를 잘못 찾은 듯하다. 한자를 모르거나 어떤 단어의 뜻을 몰랐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무지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논란의 중심이었으니까.

이 논란에 대해 상대의 말을 선의로 먼저 받아들이는 사회적 신뢰의 붕괴, 동시대 언중들이 가진 공통감각의 와해, 사회적 사안에 대한 인식론적 동질성의 상실 등을 원인으로 짚는 논평들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자신의 무지가 하나의 변명거리를 넘어 (그 무지를 배려하지 못하는) 상대에 대한 공격의 이유가 된다는 것은, 언어적 소통이 이미 신뢰와 인식의 공유라는 지반을 잃고 ‘진리’라는 희소자원을 둘러싼 시장적 경쟁과 대결로 변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치 빼앗기’ 전쟁은 시장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들로, 여기서 신뢰나 이해는 곧 양보 또는 굴복을 의미하기에 나의 이익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의 사회 언어가 의사소통의 수단이기를 그치고 하나의 서비스재로 변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예화이기도 하다. 언어는 나의 노력을 들여 읽고 이해해야 할 소통수단이 아니라 구매자가 소비하고 향유할 수 있는 서비스이다. 그런데 상대의 ‘심심한 사과’는 내가 원하는 서비스재로서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화를 내는 것은 무지와 게으름을 들켜서가 아니다. 그들은 고객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쉽고 친절한 언어 서비스를 충분히 받지 못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언어소통은 물론이고 우리들의 사회적 활동이 관계와 상호승인의 맥락을 잃고 온통 소비적 행위가 된 것은, 아마도 우리가 더 이상 사회적 인격체가 아닌 시장 행위자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구매자 또는 소비자는 보통의 인격체와 달리 자격이 필요하다. 바로 돈이나 신분과 같은 구매력이다. 이 구매력을 가진 소비자는 원하는 것을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고, 이런 시장 행위에 윤리나 사회적 규범은 필요치 않다.

이런 시장 행위의 가장 가까운 예로는 김건희씨의 ‘복사학위’를 들 수 있겠다. 표절을 넘어 복사에 가까운 논문을 가지고 박사학위를 공급하고 구입하는 시장 행위에서 연구 윤리나 규범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한다. 박사학위는 외제승용차처럼 하나의 과시재로 소비되는 물품이고, 그것을 공급한 이들도 정말로 학문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비재 하나를 공급한 것이기에 아무런 죄책감이 없을 것이다.

언어소통, 지식, 의견, 이것들은 이제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가치이기보다는 시장의 소비재이자 서비스 상품이고, 이것들을 팔고 사는 이들은 다만 뼛속까지 소비자일 뿐이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누구나 소비자일 수는 없고, 그 구매력 여하에 따라 사회적 권력이 주어진다는 점이다. 중산층 소비자 민주주의가 아마도 우리 공화국의 정체일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데는 SNS에 올라온 문규민, 박권일, 이장규씨의 글이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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