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책을 읽는 이유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벌써 30년이 훌쩍 지난 옛일이다. 대학 신입생으로 철학과에 입학한 후 처음 맞는 철학개론 시간이었다. 모든 학과가 수강하는 교양과목이었지만 대학 첫 강의인 데다 철학 전공생이었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수업을 기다렸다. 마침내 뚜벅뚜벅 강단에 선 교수는 첫 마디로 교탁을 가리키며 다짜고짜 “이게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질문했다. 강의실 안의 그 누구도 다 다른 형태로 교탁을 보고 있고, 고개를 돌리면 교탁이 여전히 거기 있는지 알 수도 없는데,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교탁’이라 부를 수 있으며, 도대체 교탁이란 것이 지금 여기에 있기는 한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충격적이었다. 나중에야 그 질문이 우리 인식의 불확실성을 묻는 철학의 오랜 방식임을 알았지만, 그날의 경험은 그간 내가 믿던 것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느낌 자체였다. 나는 그날 두 가지를 배운 셈인데, 하나는 철학이란 경이에서 시작된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철학이란 모든 것을 의심하는 태도라는 것이었다. 과학 역시 이런 경이와 의심에서 출발하거니와, 어쩌면 앎을 추구하는 인간 정신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인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우리 출판사 편집장이 <철학책 독서 모임>이라는 독특한 책을 썼다. 다른 출판사에서 책을 내서 살짝 야속한 마음이었지만, 한편 훌륭한 책으로 데뷔를 한 젊은 저자가 우리 편집장이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동료 편집자들과 수년간 진행한 ‘편집자를 위한 철학 독서회’에서 얻은 결과물인데, 그 깊이가 사뭇 놀라웠다. 10권의 철학, 인류학, 과학기술학 책에서 길어낸 생각과 서로 나눈 대화가 정갈하게 서술된 이 책에서 또 한 번 철학의 정신을 배웠다. 요컨대 철학의 출발점인 의심의 가장 마지막 도착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이며, 여기서부터 타자에 대한 이해와 만남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주장이었다.

‘나’를 벗어나서 어떻게 ‘타자’에 이를 것인가는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질문이다. 더구나 확장된 자아로서 공동체가 가졌던 동질성이 와해되고 다원화된 정체성들이 각자를 주장하며 갈등을 빚는 이 시대에, 타자에 이르는 길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정체성의 다원화와 집단 동질성 추구는 타자와의 단절이라는 문제에 직면한 이들의 서로 다른 반응일 뿐이라고 책은 설명하고 있었다. 둘을 화해시킬 수 있는 뾰족한 해법이 있을 리는 없다. 다만 이 책은 강압적 동질성이나 다원적 정체성 어느 한쪽이 아닌, 둘의 아이러니한 공존 속에서 느슨하고 우연한 연대를 통해서 새로운 연결의 가능성을 찾아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성별, 경험, 조직에 속한 편집자들이 이 시대의 근본적 문제를 다루는 철학책을 통해 다름과 일치를 확인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이러하다. 왜 하필 그들은 이런 난해한 철학책을 ‘함께’ 모여서 읽고 이런 문제를 고민할까. 혼자 읽으면 안 되는가. 그러나 철학이란 그런 것이다. 읽는 것 자체가 실천인 공부. 그런데 오늘의 철학이 ‘함께’ 문제를 해결하라고 외치고 있으니, 그 말을 따라 ‘함께’ 읽기 시작한 것뿐이다.

최근 동국대 철학과가 존폐 기로에 있다는 소식을 뉴스로 접했다. 단 한 명뿐인 정교수가 곧 정년을 맞는데, 다른 여러 대학의 전례대로 학과가 폐지될 수순에 있다는 것이다. 대학이 죽었다는 산 증거라고 할까. 이미 지식의 수익사업체, 취업 준비학교가 된 지 오래인 대학에 기대하는 마음이 순진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학조차 버린 쓸모없는 철학, 이 사회의 변종이 되어버린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대학 바깥에 여전히 있고, 이런 돌연변이들이 사회의 진화적 파국에 어떤 해답을 제시할지 누가 알랴. 의심에 가득 찬 비판적 변종들이 끊임없이 이 사회를 문제 삼는 기회를 대학이 제공하지 않으면 스스로 만들 수 있다. 철학책을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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